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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세계화의 아이러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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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소비가 미덕인 나라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가 가당한 꿈인가. 일정 기간 낯선 곳에 와서 살게 된 걸 계기로 잠시 마음에 담았던 일단사(一簞食) 일표음(一瓢飮)의 삶이 분수 모르는 허황된 꿈임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미 일상의 안락함에 길들여진 자신을 돌아보며 분주한 쇼핑 몰 순례로 미국 생활의 통과 의례를 대신해야 했다.

가는 곳마다 세일이 한창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시작된 연말 세일이 새해로 이어져 50% 세일은 보통이고 70~80% 세일도 드물지 않다. 토요일 아침 배달된 워싱턴 포스트에는 광고전단만 한 보따리다. 우리보다 싼 곳 있으면 나와 보라는 듯 가격 인하를 알리는 문구가 요란하다.

지난해 3분기 미국 경제는 8.3%의 성장을 기록했다. 올해 경우 20년 만에 가장 높은 5.7%의 성장이 예상되고 있다. 당연히 증시도 파란불이다. 지난 한 해 25%의 상승세를 기록한 다우 지수는 올 들어서도 1만선 이상의 견고한 상승세를 지속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 특수 때문이기도 하지만 달러 약세에 따른 수출 증가 효과에다 내수 회복이 본격화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미국의 고용 사정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경제에 재선 전략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고민도 여기에 있다. 경기 회복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0월 말 기준 미국의 실업자 수는 2백80만명으로 1년 전보다 약 30만명이 늘었다. 저임 서비스 직종의 실업률은 2001년 6.4%에서 지난해에는 7%로 높아졌다. 성장과 고용의 부조화에서 미국 경제의 그늘을 보게 된다.

인터넷이 생활 속에 뿌리내리면서 전체 미국 가구의 40%가 가격 비교 사이트를 통해 가격을 꼼꼼히 따져보고 나서 구매를 결정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네트워크의 힘으로 소비자들이 기업들을 공개적인 링 위에 올려놓고 서로 치고받고 싸우도록 부추겨 가격 인하를 유도하고 있는 셈이다.

코너에 몰린 기업들의 선택은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이미 미국 제조업체의 상당수가 아시아와 중남미의 임금이 싼 나라로 생산시설을 이전했다. 그 바람에 지난 3년간 제조업 분야에서만 2백8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디자인이나 성능이 괜찮은데도 값이 싸다 싶으면 어김없이 '메이드 인 차이나'다. 지난해 미국이 기록한 5천억달러의 무역적자 중 1천2백50억달러가 대(對)중국 교역에서 발생했다.

다른 한편으로 미 기업들은 신규 채용과 임금 인상을 억제하면서 기존 인력을 최대한 쥐어짜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그 덕에 미 기업들의 생산성은 지난해 9%나 높아졌다.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미 근로자들은 고강도 노동 압력에 순응하고 있다. 그 탓인지 어디서도 연말연시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다.

소비자가 기업들의 가격인하 경쟁을 부추기고, 가격인하는 다시 소비자들의 구매 심리를 자극하고 있다. 그 바람에 경기는 호전되고 있지만 소비자들 입장에서 쌓이는 건 빚이다. 신용카드 지출과 자동차 등 내구재 할부 구매에 들어간 소비자 신용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지난해 10월 말 1조9천억달러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가구당 1만8천7백달러의 외상을 지고 있는 셈이다.

소비자 아닌 근로자는 없다. 인터넷 혁명에 힘입어 강화된 미국 소비자 파워가 결국은 부메랑이 되어 미국인들의 목을 죄고 있다. 기업들은 소비자를 놓고 경쟁하고, 소비자들은 다시 일자리를 놓고 경쟁한다. 국경이 사라진 경쟁에서 중국만 신바람이 났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의 아이러니다.

배명복 순회 특파원 <워싱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