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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세계에 사·오·정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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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짐이 되는 세상이다. 마흔이 넘어 이제야 뭘 좀 알 것 같은데 '사오정(45세가 정년이라는 말)'이라며 자꾸 밀쳐낸다. '젊어야 사는' 세태이다보니 꿋꿋이 자리를 지켜며 제 몫을 해내는 노장의 존재가 더욱 값지다. 아침 드라마 '물꽃마을 사람들'의 박복만(56) PD가 그렇다.

1976년 MBC에 입사해 드라마국장(2001년)까지 지낸 그는 올 초 이 드라마의 연출을 맡으며 현장으로 복귀했다. '국장님'에서 '감독님'으로 귀환한 것이다. 한편 이재규(34) PD는 박PD보다 딱 20년 후배다. 지난해 첫 연출작 '다모'로 퓨전사극 열풍을 일으켰다.

조직 안에서는 까마득한 선후배 사이지만 연출자 세계에서는 경쟁자일 수밖에 없는 두사람을 만났다. 두 사람은 노장 PD들의 현장 복귀 현상과 좋은 드라마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털어놨다.

박복만(이하 박)=돌아와보니 예전엔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무게를 두지 않았을 법한 곳에 눈길이 자주 가더라. 균형 감각도 많이 생겼다. 젊을 때는 100이라는 고지만 보고 제작비를 펑펑 썼는데 지금은 낭비요인을 줄이면서 80의 결과를 내는 길을 택한다.

이재규(이하 이)=선배들은 과유불급(過猶不及.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의 미덕을 아는 것 같다. 젊은이들은 이걸 모르기 때문에 앞만 보고 달리다 어느 순간 뚝 부러지기 쉽다. 반면 선배들은 안전한 길로만 가기 때문에 엉뚱하고 새로운 게 안 나온다. 우리는 무모해서 불안정하나 그게 때때로 예기치 못한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박='다모'는 이PD의 젊은 감각이 없었다면 그저그런 작품에 머물렀을 것이다. 실제로 이PD보다 더 경험많고 나이든 다른 PD에게 맡기자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결과물이 기대치보다 월등히 나았기 때문에 딴 소리가 안 나왔다.

이=결국은 '선택과 집중'인 것 같다. 능력이 있다면 선후배 따지지 말고 누구에게라도 기회를 줘야 좋은 드라마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박=젊은 사람들이 점점 치고 올라오니 나이가 들면서 위기의식을 느낀다. 그러나 위기가 있어야 자기 스스로도 변화하면서 적응하게 된다. 서른살 안팎의 후배 PD가 치고오는 데 오십 먹은 선배 입장에서 앉아만 있을 수는 없다. 이렇게 모든 개체가 뭔가 해보려고 노력하다보면 조직에 활력이 생긴다. 이런 식의 공존이 가장 강력한 무기인 것 같다.

이=맞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억압하는 구도가 문제다. 젊은 사람이 윗사람 기에 눌려 순응만 하거나, 반대로 후배들이 너무 득세해 선배들을 밀쳐내는 것도 좋지 않다. 요즘의 한국 영화계를 보자. 젊은 감독들만 쏟아져 나오는 것 같다. 틀림없이 한 10년만 지나면 이런저런 문제가 생길 것이다.

박=신세대 PD든 구세대 PD든 시청자의 감정에 울림을 주는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철학은 같다. 서로의 장점을 취하면 더 좋은 드라마가 나오게 돼 있다.

이=사랑이나 추억.가족처럼 같은 소재를 놓고도 이를 풀어가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또 세대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왜냐하면 시청자가 드라마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시대와 세대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이런 변화를 얼마나 민첩하게 잡아내느냐가 성패를 가른다.

박='대장금'(MBC.연출 이병훈)과 '왕의 여자'(SBS.연출 김재형)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왕의 여자'는 20년 전에도 그렇게 만들었을 드라마다. 대결구도와 절대권력을 향한 열망, 그리고 암투…. 이를 풀어내는 방식도 전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대장금'은 뜯어보면 결국 같은 이야기지만 표현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대장금'이 이노베이션(혁신) 하는 동안 '왕의 여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나 할까.

이=TV가 늘 비슷한 드라마만 양산하는 데는 일부 시청자들의 책임도 있다. 어릴 때 한달에 한번씩 온 가족이 신촌에 있는 한 중국집에서 외식을 했었다. 버스타고 갈 때는 뭘 먹을까 고민하는데 막상 도착하면 늘 탕수육과 고추잡채를 시켰다. 손님이 찾는 요리가 뻔한데 주방장 입장에서 찾지도 않을 요리를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 모두 원하는 게 늘 똑같은 데 다른 드라마를 만들기란 쉽지 않다.

박=그렇다고 드라마가 변하지 않은 건 아니다. 어느새 굉장히 세련돼졌다. 드라마에 담기는 내용은 변하지 않았지만 옷 입는 방법이 달라졌다고 할까. 인간의 감정을 건드리는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사실 드라마는 늘 몇가지 명작의 변주일 뿐이다. '햄릿'도 있고 '리어왕'도 있는데 요즘은 너무 '콩쥐팥쥐'만 선택하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드라마는 살아있는 생물 같은 것이다. 의식적으로라도 변화를 줘야 혁신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다.

이=어떤 드라마를 보면 저 드라마를 만든 PD나 작가는 과연 자부심을 느낄까 싶은데 막상 만나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식상한 선악대결 구도지만 인기를 끄는 한 방송사의 다른 드라마를 보면서 '만약 내가 저걸 연출했다면 굉장히 부끄러웠겠다'싶었다. 그러나 함부로 말하기는 굉장히 조심스럽다. 가치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박=살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본인에게 달렸다.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정리=안혜리,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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