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술하지만 「그물」 못벗어/장씨사건 계기로 본 실명제 명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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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어찌보면 흔히 있어온 어음부도사건임에도 이번 사건이 세인의 관심을 불러모은 것은 「장영자」라는 유명인사가 「실명제」라는 큰 틀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장씨는 현행 실명제 그물이 어느정도 허술했는지를 보여주었으나 결국 이 그물을 헤치고 빠져나오지는 못했다. 새정부의 주요개혁으로 꼽히는 「실명제」 측면에서 보면 이번 사건으로 실명제 자체는 큰 상처를 받았지만 반대로 위상을 높이는 계기도 된 셈이다.
◎CD·예금등 도·차명 구멍
장여인 사건은 실명제 정착이 얼마나 멀고 험한 길인지를 그대로 드러냈다. 실명제는 우선 4건의 명백한 위반으로 상처를 입었다.
동화은행 삼성동출장소가 1백40억원어치의 양도성예금증서(CD)를 도명으로 팔았고,삼보신용금고는 차명으로 1억2천만원의 부금을 유치했다. 또 서울신탁은행 압구정동지점은 50억원어치의 CD 매각,30억원어치의 부당예금인출 등에서 각각 남의 이름을 쓰거나 실명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이같은 위반외에 「회피」 흔적도 발견됐다.
장여인은 실명전환 마감직전 이름만 남아있던 「유평상사」라는 기업을 인수,이를 통해 어름을 대량 발행하는 등 자신은 철저히 숨기는 지능적인 수법을 썼다.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이 10만∼20만원의 소액거래를 위해서도 주민등록증을 들고가 실명확인을 받는 등 「번거롭고 불편한 절차」를 감수하는 동안 이 통큰 여인은 실명제의 허점을 정확히 파악,유유히 그물을 뚫어낸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금융기관 임직원들의 적극적인 협조내지는 방조가 있었다는 점이다.
정부는 그동안 『실명제가 큰 탈없이 순조롭게 정착되고 있다』고 누누이 이야기해 왔으나 정작 일선 금융기관 창구에서는 위법·탈법에서부터 법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는 회피사례까지 다양한 수단들이 개발,사용돼온 것이다.
◎「돌려치기식」 자금조달 제동
불행중 다행이라고나 할까,이번 사건은 실명제가 허술한 망정 빠져나가기는 쉽지 않다는 점을 일깨워주기도 했다.
장여인은 ▲실명제 실시로 운신의 폭이 크게 줄어들었고 ▲돈이 모자라 부도위기에 몰렸을 때에도 실명제에 막혀 해결수단을 찾아내지 못했다.
과거에는 무기명 금융자산(CD나 개발신탁 등)을 사주는 대가로 어음할인·대출 등 특혜를 받아내기가 쉬웠으나 실명제 이후에는 이같은 「주고받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실제로 장여인은 이번에 일부 은행들로부터 이같은 거래를 거절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큰 은행을 상대 못하고 지점·출장소나 신용금고같은 「변두리」 점포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자금자족으로 부도위기에 처했을 때 종전에는 타인명의 또는 특정기업이 발행한 어음을 우선 끌어대 위기를 넘긴뒤 빌린 어음의 만기가 돌아오면 다시 다른 어음으로 갚아주는 수법으로 대처할 수 있었으나 이번에는 이같은 「돌려치기식」 자금조달이 통하지 않았다.
실명제로 어음을 빌리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의 경우 유평상사 어음을 대명산업 어음으로 일단 막았으나 두 어음 모두 부도가 나버렸다.
결국 허술하나마 작동한 「한국식 실명제」가 큰 불은 막았다는 것이 금융당국의 분석이다.<민병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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