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탈출(28) 얼굴이 벌겋게 되어 길남은 명국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어린 놈이래도 그렇게 생각이 얕아서야 무슨 일을 함께 하겠냐?』 『저는 그냥.보기에 딱해서….』 『뭐가 보기 딱해?』 『그렇잖아요.물건값 잔돈도 제대로 안 주는데,그걸 보고그럼 그냥 지나치자는 거예요?』 『지나쳐.중뿔나게 나서지 말아.무슨 소린지 알아듣겠냐? 이제부터는 그러라구.』 옆에 서 있던 진태가 명국의 옷소매를 잡았다.
『아이구,아저씨도.말이야 바로 해야지요.길남이가 해도 백번은잘 했지요.』 『이놈은 개×에 보리알 끼듯 끼어들기는.』 내지르듯 눈을 부라리며 소리치는 명국의 서슬에 머쓱해진 진태가 머리를 긁적였다.휭하니 명국은 앞서 가 버리고 둘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왜 저러냐? 저 양반.』 『잔 신경 쓸 일이 많은가 보다.
』 『아니,이게 무슨 화낼 일이라고 그러니.맞잖아,네가 잘한 거 아냐.왜놈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는데 그러면 됐지.난 속이 다 시원하던데,그걸 가지고 남의 일에 왜 끼어드냐고 하면,그럼눈 감고 귀 막고 살라는 얘기 아냐.』 『바로 그말이야.눈 있어도 난 장님이오,입 있어도 난 버버리요 하고 살라는 소리지.
』 그날 밤,명국은 벽에 기댄채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길남이를 데리고 꼭 여길 빠져나가야 하나 싶었기 때문이었다.잡히면 죽는데,잡히면 죽지 않으면 병신되는 건 불을 보듯뻔한데,이제 와서 내가 왜 여길 빠져나가려고 이 마음 고생을 하고 있는가.그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노무계 사람들의 감시도 마찬가지다.걷어차고 주먹질하고 잘못 걸리면 쥐어짠 행주처럼 흠씬 두들겨맞아야 하는 것도 달라진 것은 없다.그런데 왜 이제 와서 여길 탈출하겠다는 건가.똑같은 생각을 명국은 한다.
옆에서 윤씨가 떠들고 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이게 아주,벼룩이 등때기에다가 육간대청을 지을 인사일세.』 『뭐 내가 틀린 말 했나?』 『송곳도 끝부터 들어가는 거여.
일이라는게 다 순서가 있는 법이라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