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그사람>30.故박종철군 검안담당 의사 오연상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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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우리나라에서 1월14일은 민주주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날로 꼽힌다.만7년전인 지난 87년1월14일-.
서울대생 朴鍾哲군(당시 21.인문대언어학과3)이 서울용산구갈월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물고문끝에 시체로 변했고 결국 이 사실이 밝혀져 정국과 사회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았다.
당시 5共군사정권의 삼엄한 분위기에도 불구,물고문흔적이 있음을 기록으로 작성해 그후 결정적인 증빙자료로 제공했던 장본인은현재 중앙대 교수겸 부속병원 내과의사로 재임하고 있는 吳演相씨(38).81년 서울대의대를 졸업,전문의를 취득 한뒤 86년3월부터 중앙대 용산병원에서 근무해온 그는 사건당일 당직의사로 근무하다 자정이 막 지난 심야에 찾아온 「대공분실 직원」2명과함께 엉겁결에 갈월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취조실에 불려갔다.
『나중에 알고보니 朴군이었지만 축처진 사람이 누워있고 물기가흥건했죠.「꼭 살려내야한다」며 다그치기에 재빨리 심폐소생시술을시작했지요.인공호흡을 하고 충격요법을 가하면서 심장마사지를 했으나 소생은 불가능했습니다.』 사망진단서를 떼어주고나서 만일을위해 당시 정황을 별도로 기록,보관해뒀던 그는 사건이 확대되자결정적인 단초로 제공했다.핵폭탄같은 그의 증언은 당시 비등했던여론을 폭발시켰고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일어나면서 5共세력에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고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의사로서 생명이 존귀하다는 일념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朴군 사건때도 왜곡하지 않고 사실을 기록했어요.스스로 판단할수 없거나 해결하기 어려울수록 원칙대로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吳씨는 사건발생후 빗발치듯 걸려오는 전화때문에 정상적인 근무를 할 수 없어 자의반타의반으로 휴가를 떠나야했다고 당시의 순간들을 되새겼다.시시각각 언론에 보도되면서 신원을 밝히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수백통의 전화가 쏟아져 들어와 특히 병원교환원들과 아내를 괴롭혔다고 회상했다.
『전화내용을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지만 격려와 찬사를 보내는사람들의 전화에 용기를 얻었다』는 그는 『왜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며 비수처럼 파고드는 협박전화에 밥맛을 잃을 지경이었다고했다. 87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서 선정한 인권상을 수상하기도한 그는 수상식장을 포함해 사건이후 朴군가족을 두세차례 만났다고 했다.
1m82㎝.1백㎏의 거구인 그는 당뇨 내분비가 전공.92년10월말~93년10월말 영국 잉글랜드 셰필드大에 유학을 다녀왔다.부친 吳俊植씨(61)도 이비인후과의사인 그는 주말마다 부인.
두아들을 동반,아버지가 운영하는 양로원인 경기도고양 시벽제의 順愛院을 찾아 무료시술해 주는 것이 병원외 일과다.잠시나마 찌든 서울을 떠나 1백여명의 노인들과 함께 어울려 말상대가 되는것이 보람있는 레저가 된다고 했다.
〈裵有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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