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각>무식한 국민의 부끄러운 증거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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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얼마전 어느 장관이 기자들앞에서「무식한 국민들」이란 말을 했다 해서 모든 언론들이 대서특필로 공격하고 마침내 국회 상임위에서조차 거론돼 그 장관을 궁지에 몰아넣은 일이 있다.언론이나국회의원들은 그 장관이 그런 말을 입밖에 냈다는 사실만으로 마치 국민모독죄라도 범한듯 비난에 열을 올렸지만 그말의 내용이 진실에 바탕을 둔 것인지,거짓인지를 따져보는 자세는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블록화.세계화라는 일견 상반되는 듯한격변의 시대조류에 전 세계가 휘말려들고 있다.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APEC)정상회담에 다녀온 대통령도 국민들에게「국제화와 세계화」의 대세를 역설하는 마당에 만약 그 장관 의 발언이 사실에 입각한 것이었다면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화와 국제화는 곧 세계적으로 경쟁이 가능한 합리적인 사회경제제도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 국민과 비교하더라도손색이 없을만큼 지적 수준이 높고 행동양식이 건전한 국민들의 존재를 그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한 나라 국민들의 유.무식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지금까지 제시돼왔던 객관적 기준으로는 문맹률.정규교육과정에의 참여비율.대학진학률등을 들수 있겠다.그러나 이제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후진국간의 도토리 키재기식 비교기준에 지나지 않으며 국제화.세계화를 외칠 정도의 국가들에는 적용될수 없는 잣대가 돼버렸다.이런나라들에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은 필자 개인의 생각이지만 과학기술수준.고등교육의 질.국민 1인당 연간 독서량.도서관 수와 장서량.공중도덕과 질서의식수준.환경보 호에 대한 관심도등이 더욱적합할 것이다.이러한 기준으로 우리 국민들의 지적수준을 측정해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낙후된 과학기술수준,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절대다수의 학생들에 대한 사실상의 교육포기상태,대학졸업자의 형편없는 교육수준,졸업후에는 책과 완전히 담을 쌓고 살아가는 국민 독서수준,후진국보다 못한 도서관 시설,세계 최고의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률,아름다운 산천에 마구 버려지는 쓰레기등은 정밀한 잣대 없이도「무식한 국민」이란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한 증거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우리 국민들을 이렇게 만든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그것은 바로 잘못된 교육제도를 파행적으로 운영해 온 정부,도서관의 장서구입 비용을 쓸데없는 예산낭비쯤으로 여겨온 정부당국에 있다.구설수로 시달렸던 그 장관은 어쩌면 정부 안의 해당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기자들에게 하고만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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