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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메이커>루브르공사 수석건축가 중국계 미국인 페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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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83년7월 세계 최대 박물관으로 만드는 大루브르 공사에 中國系 美國人 IM 페이(76)를 수석 건축가로 공식 지명했을 때 프랑스인들은 불만을 감추지 못하고 흥분했다.
8백년의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루브르에 손을 댈 경우 오히려자연미를 해칠 수 있다는 명분이었다.그러나 실은 17년의 시간과 50억~60억프랑(7조~8조4천억여원)이란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는 大役事였고 에펠탑과 함께 루브르가 프랑 스인에게 주는상징적 의미 때문에 외국인이 건축을 총지휘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몹시 상했기 때문이었다.
이어 1m짜리 유리판 6백75개로 조합된 21m높이의 유리피라미드를 루브르의 안뜰 한복판에 세운다는 페이의 구상이 밝혀지자 일제히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루브르에 디즈니랜드에나 어울리는 오락기구를 세운다는 비판이었다.그러나 6년이 지 난 89년 봄 85t의 철과 1백5t의 유리로 만든 피라미드가 마침내자태를 드러내자 프랑스인들은 경탄했다.
7백93개의 마름모와 삼각형으로 구성된 기하학적인 조형미와 자연광을 이용한 현대版 피라미드의 탄생에 온갖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지난 18일 루브르박물관 개관 2백주년에 때맞춰 리슐리유館이 완전히 개조돼 새롭게 탄생하자 프랑스 언론들은『루브르의 완벽한 부활은 위대한 건축가 페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격찬하기에 이르렀다.
大루브르의 건축가로 지명되기 전까지 프랑스에서 거의 알려지지않았던 페이는 당시의 부정적 여론에 대해『새로움을 두려워하는 無知』였다고 일축하고 루브르는 생애 최대의 도전이었다고 회상했다. 1917년 中國 廣東에서 태어난 페이는 上海에서 공부한뒤18세되던 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60년대부터 현대미와 고전주의미를 조합시킨 건축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후 워싱턴국립갤러리와 홍콩의 차이나뱅크를 건축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게 됐다.
51년 처음 루브르를 방문하고 자신도 루브르같은 건축물을 만들고 싶어했던 막연한 꿈이 40여년만에 실현됐다는 페이는 루브르에 비견할만한 건축물이 나오려면 1백년이상은 더 기다려야 할것이라고 평가했다.
페이는 포스트 모더니즘등 자신의 예술이 학파로 분류되는 것을거부한다.그는『아름다운 것은 영구하다고 믿으며 감성에 충실할 뿐』이라며 자신의 건축을「形과 공간의 예술적 조합」이라고 정의한다. 페이는 97년까지 튈르리정원 재정비등 大루브르의 3단계공사를 마무리한뒤 현역에서 은퇴할 작정이다.
그는 앞으로 日本 京都에 교회와 종교박물관,그리고 그리스에 프랑스 예술품을 소장한 개인박물관을 세워 후세에 남길 꿈을 가지고 있다.
[파리=高大勳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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