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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력을 가르치자(선진교육개혁: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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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달달 외우기만 하면 망한다/영 장학관 한국 왔다 “실망만”/선생님 강의없이 토론식 수업/학교서 배운 것 생활에 연결되도록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교육열과 문맹률 최저를 자랑하는 한국교육이 아직도 넘지 못한 벽은 「창의성」이다.
선진국들이 21세기에 대비한 창의력 개발에 전력투구하는 동안 잡다한 지식의 주입·암기에만 급급해온 우리 교육은 국제경쟁력 신장에 도움은 커녕 그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
교육에서 생성된 창의적 에너지가 기업의 새상품 개발능력으로 전환돼 국부의 근간이 되고 「개성」과 다양한 문화창출을 가능케해 결국 국가·국민 모두의 총체적 질을 높이는 시스팀­.
그것이 바로 선진교육이다.
영국 런던시내 남쪽 서튼지역의 평범한 주립학교인 데벤셔국교는 학생 4백10명,교사 16명인 서튼의 40개 국교중 하나다.
기자가 찾아간 10세짜리 4학년반에선 「날씨와 풍향」이란 주제로 자연수업이 한창이었다. 30여명의 아이들이 6명씩 그룹으로 자유롭게 대화하며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40대 여교사는 일간지에 실린 일기예보를 복사,학생들에게 돌리더니 「신문 날씨면을 어떻게 읽고 지도위에 표시된 기압 등고선은 무슨 뜻인가」 등에 대해 설명했다.
바람의 속도와 날씨에 대해 설명하던 여교사가 『갑자기 바람의 속도를 재는 기구를 만들어 봅시다』고 말하자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토론하며 익숙한 솜씨로 작업에 착수했다.
『호루라기를 세게 불면 소리가 크게 나잖아요. 바람을 모을 수 있게 종이를 둥글게 말아 호루라기 앞에 연결시키고 소리의 크기로 속도를 측정할래요.』
핀치군(10)의 간단하고 기발한 착상이다.
교과서 따로,생활따로가 아니라 학교에서 배운 것이 곧바로 생활로 연결되게 하는 것,수업내용이 개인의 창의성으로 접목되게 하는 배려다.
이 학교 페렐레 교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하면서 배우는 것(Learning by doing,not Writing)이 영국 교육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10일 프로스트씨 등 영국 장학관 3명이 2주간 한국 교육제도를 시찰하러 왔다 갔다.
『한국이 눈부신 고도성장 배경엔 교육이 있는 것 같다. 영국도 교육개혁을 하는데 한국으로부터 배울게 많을 것』이라며 한국교육을 관찰하고 책을 쓰겠다는 것이 방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한국 학교들을 직접 보고난뒤 내린 결론은 달라져 있었다. 『교사 혼자 일방적으로 떠들고 학생들은 수업시간이 끝나도록 질문 한번 안하고 칠판만 죽은듯이 쳐다보고 있고』 『실험·실습은 거의 없는데다 과학도 외우는 것 일색이어서 도대체 독창적이란게 생겨날 수 있을지』 『거의 모든 학생들이 많은 돈을 주고 학원에 다닌다면 학교가 왜 필요한 것인지』….
영국 데벤셔국교의 창의성 교육을 보고난 뒤 기자는 왜 프로스트씨 등 영국 장학관들이 그토록 실망했는지 비로소 이해가 갔다.
삼성물산 영국 현지법인에서 5년째 근무하는 윤용암차장은 국민학생인 딸 2명이 받는 교육을 통해 느낀 선진국 교육을 「콜럼버스의 달걀」로 표현했다.
『학교에서건,기업에서건 창의력과 독창성이 없으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알고 있는 지식의 양은 큰 차이가 없고 어떤 경우 우리가 더 나은데도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면에선 도저히 상대가 안돼요. 「발상의 혁신」,결국 콜럼버스의 달걀인데 문제는 우리 교육방법은 정반대라는 것이지요.』
프랑스 파리 바뇰레시 이상구목사의 집. 취재팀은 에콜(고등직업교육기관)에 다니는 한국 유학생 9명을 만나 이들이 느낀 양국 교육의 근본차이점을 물었다.
『암기·주입식과 창의력 교육의 차이지요. 이곳에선 단순히 정답을 맞히는게 아무 의미가 없어요. 「창의성」 「너만의 것」,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는 얘기지요.』 유학생들의 이구동성이다.
『한국에선 독창성이 생명인 미술대에서조차 교수님이나 선배들의 눈총 때문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게 거의 불가능한 분위기입니다. 여기선 정반대로 새로운 것을 못내놓으면 학교를 떠나야 합니다. 전체를 자꾸 틀속에 넣어 비슷하게 만들고 이미 주어진 정답을 맞히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는 한국이 왜 세계무대에서 한계를 맞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S여대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유학온 최은정양(25)의 말이다.
주입·암기식 교육의 원조는 아마 일본일 것이다. 그들은 선진국이 수백년간 이뤄놓은 근대학문과 산업기술을 주입·암기식 교육을 통해 가장 짧은 기간안에 흡수했다.
그러나 일본은 나카소네 총리 당시인 84년 「21세기의 출범」이라는 이름으로 교육개혁을 시작하면서 첫번째 목표를 재빨리 「창의력과 개성신장」으로 바꿨다.
『선진국에서 더 배울 것은 없고 21세기를 위해 일본이 할 일은 창의력 교육』이라는 일본 문부성 관리의 말처럼 일본은 80년대 후반부터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아예 개념 정립을 다시하는 커다란 변혁을 치르는 중이다.
『일본도 우리처럼 입시지옥에 주입식 교육을 하지만 잘만 산다』는 말은 일본 교육개혁의 도도한 흐름을 잘 모르고 하는 얘기다.
우리 교육당국도 나름대로 주입식 교육을 없애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서울교육청의 경우 올해부터 국민학교 1∼2학년 시험을 아예 없앴고 3∼6학년은 1년에 두번만 시험을 치르게 하고 있다. 시험도 가급적 실험·실습을 위주로 하고 성적평가도 단순히 점수를 기록하는게 아니라 교사가 「이 학생은 계산력은 뛰어난데 도형부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국어에선 맞춤법은 좋은 빨리 읽는데 서투르다」는 식으로 서술·기록하게 하고 있다.
새 제도가 도입된뒤 서울교육청은 일선 교사·학부모들로부터 항의전화를 많이 받았다. 『옛날에 비해 교사들의 할 일이 너무 많아졌다』 『왜 우리 아이 실력을 정확히 알 수 없게 하는거냐』
『수십년간 주입·암기식 교육에,국어·산수점수를 1점이라도 더 잘받은 아이가 우수한 아이라는 식의 인간평가에 길들여진 상태여서 그같은 교육이 장기적으론 아이를 망치고 국가경쟁력을 떨어드린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국민학교에서 만큼은 창의성 교육을 정착시켜 나갈 방침입니다.』
서울교육청 조성선 초등장학과장의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국민학교 교육이 정상화로 간다해도 암기된 지식의 양을 기초로 학생을 선발하는 대학입시와 중·고교 교육이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면 도로아미타불이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주입·암기식 교육은 뒤늦게 근대화를 시작한 우리에게 어쩌면 불가피했고 「한강의 기적」의 바탕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런식으론 안된다』는 것이 세계 석학들의 충고고 동시에 선진국 교육을 지켜본 취재팀의 결론이다.
지식이 폭발적으로 생산되는 시대에 과거의 지식만을 암기시키고 주입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고 창조해내는 창의력 교육이야말로 절박한 과제다.
『충분한 교육재원이 확보돼야』 『이번 입시에서는 일단 그냥 뽑고』 『내 아이는 우선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사회여건이 조성된 다음에』 등의 눈치보기와 변명은 이제 집어치우자.
정부가 나서고,기업이 지원하고,교사·학부모가 각성해 잘못된 교육을 바로잡아야 한다. 교육개혁은 남의 얘기가 아니라 우리 발등의 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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