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질비디오(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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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악령에 정복돼 죽은 한 사나이가 흡혈귀가 돼 그의 형집에 잠입한다. 흡혈귀는 그의 친형이 우연히 흘린 피를 먹고 인간의 형체를 반쯤 회복한다. 사람의 형상을 완전히 회복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의 피를 먹어야 한다며 자기와 불륜관계인 그의 형수에게 피를 요구한다. 시동생과의 옛정을 못잊어 하던 형수는 창녀로 가장해 길거리에서 남자를 유혹해다가 흡혈귀에게 계속 피를 먹도록 한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결국 형과 정부인 형사를 희생시키고 조카까지 죽이려다 마법이 풀려 흡혈귀는 완전히 죽게 된다. 시중에 나도는 한 비디오영화의 대강 줄거리다.
이 비디오영화는 줄거리의 패륜과 잔혹성만으로 문제가 그치질 않는다. 스토리 전개과정에서 찢기는 사지,조각난 인체,먹다 남은 시체에서 우글거리는 구더기떼 등 잔혹하기 짝이 없는 장면들이 극사실적으로 무수히 묘사된다. 사람의 머리를 쇠망치로 연거푸 내려치는 장면,그때 튀기는 핏방울들,형수와 시동생간의 격렬한 정사 등 차마 입에 올리기도 낯뜨겁고 처참한 장면으로 일관하고 있다.
최근 한 여성독자가 고교생 아들이 빌려온 비디오영화를 우연히 보았더니 이런 내용이더라며 전화로 개탄과 울분을 터뜨렸다. 직접 확인해보았더니 과연 그랬다. 어디 이 한편 뿐이겠는가.
이 비디오에는 수입·복제 허가번호와 그 밑에 공륜심의필 심의번호까지 버젓이 적혀있다.
그리고 「연소자관람불가」라는 붉은 금기표시도 있다.
지난 91년에 제정된 우리나라의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에는 이 법이 『국민의 문화생활 및 정서생활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영화의 적나라한 패륜과 잔혹성이 과연 이 법규의 취지와 어떻게 부합되는지 짐작도 안간다.
이렇게 터무니없는 저질영화가 「연소자관람불가」라는 눈에 띌까 말까한 금기표시 하나로 복제허가와 심의필의 책임을 면할 수 있다고 담당자들은 생각했을까. 또 이런 금기가 비디오 대여업자의 양식에 의해 지켜진다고 그들이 믿었다면 너무 순진하다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바흐나 모차르트 같은 명곡음반에 대해서는 이 법 규정에 따라 다섯장 이상 외국에서 들여오려면 관계장관의 추천서가 있어야 한다며 반송조치한다고 들린다. 우리 음반·비디오 정책은 저질에는 너그럽고,고급에는 열등의식을 느낀 나머지 심통을 부리는 체질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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