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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국」 기초부터 다시쌓자(선진국 무엇이 다른가/현장취재:2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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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견본시장­메세/인간이 만든 모든 물건 전시/자동차서 각국 푸성귀까지 선봬/한해 백여회 개최… 상품개발 촉진/새상품 세계무대 진출 “통로”/구경꾼 아닌 전문가·상인 위한 큰 장터
유럽 어느 곳으로나 철도로 연결되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으로부터 전철로 세번째 정거장에서 내리면 프랑크푸르트의 명물인 「망치질하는 장인」 조형물을 만난다.
천천히 망치질을 하고 있는 10층 건물 높이의 이 「장인」이 바로 독일이 자랑하는 메세(Messe)를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메세란 견본시 또는 큰 장터라는 뜻의 독일말이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물건은 독일의 메세에 전시된다」­.
짧지만 자신만만하기 짝이 없는 위와 같은 메세에 대한 독일인들 스스로의 정의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독일식 큰 장터인 메세는 실제로 독일산업을 든든히 받치는 중요한 기둥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년동안 독일에서 메세라는 이름으로 개최된 견본시는 1백6건,참가단체는 13만8백2개.
전시기간이 짧은 것은 2∼3일,긴 것은 열흘씩 되는 것도 있으니 결국 휴가철을 제외하곤 1년 내내 독일의 어디에선가는 메세가 겹쳐 열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지난해 메세를 찾은 방문객은 자그마치 9백만9천명.
이 가운데 외국인이 1백40만명이나 된다.
「국내용」이 아니냐는 비판도 종종 제기되고 있는 우리의 대전엑스포와 근본적으로 다른 「국제용」인 것이다.
메세가 다루는 전시품목은 참으로 다양하다.
자동차·전자제품·장난감·소비재 메세는 물론 세계 각국의 푸성귀만을 전시하는 녹색 메세,하수 및 관련장비를 전시하는 하수메세,벽·지붕의 재료만을 한데 모아놓은 지붕·벽메세,무형상품인 관광을 주제로 열리는 관광메세 등 별의별 메세가 다 있다.
그러나 새 상품을 만들어 세계무대에 내놓으려면 독일의 메세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같은 메세가 가져다주는 직·간접적의 경제적 효과는 계량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1240년부터 메세를 열기 시작했고 지난해에만 55개의 메세를 유치한 독일의 대표적 메세도시인 프랑크푸르트의 사례를 보면 메세의 경제적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볼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시가 60%(2억1천만마르크),헤센주가 40%(1억4천만마르크)를 투자해 세운 「메세 프랑크푸르트 유한회사」는 지난해 전시공간 임대료와 방문객 입장료로 모두 3억3천6백만마르크의 수입을 올렸다.
이 지역 1백45개 호텔 2만1천48개 객실은 메세 기간중 거의 1백% 예약된다. 보통 1년전에 예약해놓지 않으면 메세기간중 프랑크푸르트에서 호텔방을 갑자기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요,요금도 보통 때보다 30% 정도 올라가지만 아무도 군소리를 못한다.
유럽 최대의 쇼핑거리라는 괴테 슈트라세가 프랑크푸르트 메세장으로부터 걸어서 15분 정도의 거리에 2.5㎞나 뻗어있는 것도 「메세경기」 덕이 크다.
그러나 이같은 직·간접 수입들도 메세를 통해 기업의 생산·판매를 성사시키고 기업가·소비자들에게 상품 아이디어 및 정보를 제공하는 등 메세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 비하면 별 것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엑스포라는 이름 하나를 내걸기 위해 국제사회에 사정사정했고 국민학생부터 심지어 고등학생까지 견학·수학여행을 보내는가 하면 단체관광객들을 받아 「입장객수가 예상보다 많다」고 안도(?)하고 있는 우리의 엑스포와 부러울 정도로 「산업활동의 기반」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독일 메세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전시장 규모가 크다거나,예산을 많이 들었다거나 하는 양적인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지난 6일부터 11일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북 메세가 열렸다.
올해로 45번째를 맞은 이 북 메세는 장사꾼을 위한 것이지 구경꾼을 위한 것이 아니다.
6일동안의 전시기간중 처음 사흘과 마지막 하루는 출판업자·서적 판매업자,그리고 이들과 동행하는 전문인들만 메세장에 들어갈 수 있으며 일반 관람객은 중간 이틀만 입장이 허용된다.
전문 책장사를 위한 입장료는 6일동안 우리 돈으로 약 1만8천원,일반인을 위한 하루 입장료는 약 6천원이라는 식으로 입장료에서도 장사꾼과 구경꾼의 차별대우가 심하다.
북 메세장 안으로 들어가보면 「디자인에는 돈보다 아이디어가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벽면·바닥은 가장 기본적인 소재인 석면보드와 하드보드만으로 평면처리돼 있고 천장에는 백혈전구가 매달려 있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이처럼 단순한 소재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흰 바탕에 형광으로 세계 유수 기업들의 심벌마크를 실크 프린팅하는 것만으로 전시장은 매우 독특한 분위기를 강력히 내뿜고 있었다.
업계의 흐름을 앞서서 주도하는 실험성·과감성도 물론 돋보인다.
전시장 1번홀은 캘린더·전자출판물 공간으로 할애되고 있었는데 정보와 지식전달 매체로서의 캘린더 기능을 새롭게 해석,책·달력의 기능을 함께 갖도록 만들어진 수천종의 캘린더가 걸려 있었다.
북 메세장에서 만난 출판인 박영율씨(37·지식공작소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메세를 보고난후 시내 문구점에 들러 포킷 다이어리를 하나 샀다가 적잖이 놀랐습니다. 다이어리의 정보란에는 내년 독일에서 벌어지는 1백여개의 각종 메세 일정표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1년내내 메세를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메세장 안엔 순환버스는 물론 움직이는 보도,맥주집,커피숍,잔디 휴식공간,친절하고도 자세한 표지판 등이 거의 완벽히 갖춰져 있다.
그러나 이같은 물리적인 시설은 기본중의 기본일 뿐이다.
1년내내 기억하고 확인하고 예약해야 할 만큼 사회·경제·문화적으로 메세가 독일 국민들의 인식속에 확실히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독일을 메세의 나라로 만든 가장 중요한 기초일 것이다.
◎일본식 메세 「마쿠하리」/독일서 배워 더 뛰어나게 창조적 모방/“첨단 단지” 한바퀴 도는데 차로 반시간
메세는 독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 동경도에 붙어있는 지바(천엽)현에 가보면 일본식 메시인 마쿠하리(막장) 메세와 마주칠 수 있다.
외국 것을 배워 와 자기 것으로 더 좋게 만들어내기로 정평이 나 있는 일본인들이 독일의 메세를 그냥 구경만 하고 놓아둘리 없는 것이다. 도로표지판에 명기되어 있는 거리의 이름부터가 아예 메세 그대로다. 이름은 독일과 같지만 그 시설이나 배치를 보면 독일의 그것보다 훨씬 새롭고 나으면 나았지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후발 주자」로서 처음으로 「첨단」을 가미할 수 있다는 이점을 최대한 살리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 도로는 바둑판 모양으로 시원하게 이리 저리 뚫려있고 세계 유수의 호텔 체인과 다국적 기업들의 사무실 빌딩들이 우뚝우뚝 솟아있는 사이 사이로 초대형 전시장과 업무지원 빌딩 등 국제규모의 박람회·전시회·국제회의를 개최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을 만큼 충분한 기반시설들이 잘 배치되어 있다. 자동차로 이 지역을 천천히 한바퀴 도는데 거의 반시간이 걸릴 만큼 넓은 지역이지만 요소요소에 에스컬레이터,움직이는 보도 등이 설치되어 있어 걸어서 이 지역을 다니는데 큰 불편은 없게 되어 있다.
지역 전체가 일본 특유의 정갈함으로 잘 치장된채 마치 「앞으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박람회·전시회·국제회의는 우리가 모두 유치하겠다」는듯 만반의 시설투자를 끝내놓고 있는 것이다.<김수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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