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그여자의4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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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3.가을 다음 해 구월(16) 『제가 늦었군요.』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바로 앞에 감색 셔츠 속에 청색 남방을 받쳐 입은남자가 서 있다.청바지에 흰운동화를 신은.
은서가 엉거주춤 일어서려 하자,둥근 탁자 맞은편에 앉는다.은서와 남자는 서로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몰라 괜히 다른 데를 쳐다보다 시선이 부딪쳐 웃고 만다.
『오랜만이에요.』 『그렇죠.』 다른 자리에서 주문을 받고 가던 길에 커피 숍 종업원이 그들의 자리에 와서 선다.은서하고는낯이 익어 종업원이 은서를 향해 살포시 웃는다.
『뭐 마실래요?』 『커피 마시겠습니다.』 은서가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천원짜리 한장을 내밀며 커피 두잔요,하니까 남자가 은서를 빤히 쳐다본다.종업원이 커피 두잔을 가져와 각자 앞에 한잔씩 내려놓고 은서 앞에 백원짜리 동전 두개를 내려놓고 가자,또 빤히 쳐다본다.
『여기 커피 값이 한잔에 사백원씩 해요.구내라서 그런가 봐요.싸죠?』 『네,그렇군요.』 커피에 프림 대신 엽차 잔의 물을조금 부어 한모금 마시는데 마음이 싸아해져 은서는 얼른 시선을유리창 밖의 노래하는 노인에게로 다시 옮긴다.
이 이와 내가 왜 만나고 있나? 예기치 않은 사람에게서 거의일년만에 예기치 않은 전화를 받고 이렇게 만나 겨우 커피를 시키고 멋쩍어 커피 값이 싸다고 말하고…이 가벼운 인사치레의 대화들이 왜 이렇게 비현실적인가.
노래하는 노인은 이제 마이크를 내려놓고 짐을 챙긴다.해가 저물려 하니 노인도 어디론가 돌아가려는 모양이다.은서는 형체만 어른거리는 노인의 짐싸는 모습을 그냥 내다보고 있다.노인이 차단기 앞으로 나와 비척비척 걸어갈 때에야 은서는 앞의 남자를 쳐다봤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 고갤 숙이고 있던 남자는 은서의 어떻게 지냈느냐는 질문에 고갤 들곤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는 그냥 다물고 만다.어떻게 지냈다고 말해야 할까? 남자는 갑자기 모래바람같은게 가슴 속을 훑고 지나가는 것같다.화연의 장례를 함께 치러주었던 저 여자 앞에서,화연이 깊이 사랑했던 저여자 앞에서,나는 지난 일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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