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묻지말자”로 급선회/실명제보완책 배경과 문제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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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세금만 내면 불문” 불안진화 겨냥/「검은돈에 퇴로」… 본래뜻 흠집우려
정치 논리에만 지나치게 기울어 경제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온 금융실명제의 골격이 많이 수정됐다.
수정됐다기 보다는 「현실화」됐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보완책」이라 부르든,「후속조치」라 일컫든 그간 논란의 핵심이 되어 오던 부분은 장기저리채권 발행여부였다.
따라서 장기저리채권을 발행하여 뭉칫 돈들에게 「퇴로」를 열어주어야 한다는 주장에 귀도 안기울일 것 같던 청와대 주변의 무거운 분위기가 비록 「기명식」이라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그래도 바뀐 것은,그만하면 「YS적 대선회」라 할 만하다.
○국민정서에 신경
실명등록채권은 간단히 말하면 「증여세에 상응하는 금리상의 불이익을 받고 실명으로 상속·증여를 한다면 과거를 묻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간단한 논리를 설득하는데 왜 그처럼 힘이 들었는가. 정부 스스로가 그간 여러 차례 밝혔듯이 『지난 8·3조치때 재산이 1세에서 2세로 세금없이 상속됐는데 이번에 장기저리채권을 발행하면 재산이 또다시 2세에서 3세로 상속·증여되며 이는 「국민 정서」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 때문이었다.
그러나 10년동안 1∼3%의 금리를 받아가며 돈을 묻어둔다는 것은 현재 자금이 노출되어 법대로 증여세를 무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계산이 엄연히 나오는 바에야,증여세를 물고 재산을 주나 자식 이름으로 채권을 사주나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결국 이제 정부가 신경을 써야 하는 「국민정서」는 『왜 재산 상속을 시켜주느냐』가 아니라 『언제는 안된다더니 이제 와서는 왜 딴 소리냐』하는 것이었다.
정부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또 있다.
과연 실명등록채권이 얼마나 팔릴 것이냐는 문제,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오는 10월12일까지의 실명전환 실적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이냐는 문제다. 또 채권이 많이 팔리면 팔리는 대로,안 팔리면 안팔리는 대로 정부의 고민거리는 계속 남게 되어있다.
채권이 많이 안팔린다는 것은 자칫 실명전환 실적이 보잘것 없게 나타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이 경우 실명전환 기한이 지난 뒤에 「겨우 이만한 실명전환 실적을 위해 경제를 주춤거리게 했느냐」는 현실적인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또 채권이 많이 팔릴 경우에는 자칫 그간 위장 분산되어있던 대주주들의 주식이 채권으로 대거 이동해 주식 시장의 폭락을 비롯,시중 자금의 대이동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으므로 정부는 이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
○증시혼란 올수도
어쨌든 정부와 민자당이 이번에 실명제 보완조치를 내놓은 것은 「과거를 묻는」 실명제에 대한 불안심리를 없애 위축된 상거래를 활성화하자는 뜻이 담겨있다.
3천만원이 넘는 돈을 찾아가도 일절 자금조사를 하지않고 세금만 내면 과거의 비리를 캐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천명한 것도 불안심리를 없애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금융실명제 실시단의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이번 조치로 인해 과거를 캐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으며 다만 탈루된 세금을 냄으로써 과거를 묻는 실명제의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엄밀히 따져보면 실명제 실시와 함께 모든 돈의 출처를 따지려는 의도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런데도 세무조사의 기준이 논란이 되고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세무행정에 대한 불신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조사를 하지않는다고 해도 국민들이 이를 믿지않는 것이다.
마치 「양치기 소년」 꼴이다. 실명제의 준비과정에 참여했던 재무부 관계자는 『세정에 대한 불신이 이렇게 큰 줄 몰랐다』며 『과거에 정치적으로 세무조사를 이용하지 않았거나 일선 세무행정이 납세자에게 신뢰를 줬다면 요즘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토로할 정도다.
문제는 이같은 세무조사 기준완화로 인해 「그물코」가 생각이상으로 커져버린 사실이다. 정부는 『후속조치는 있어도 보완대책은 있을 수 없다』며 초법적인 대통령 긴급명령의 정신을 새삼 강조하고 있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허점을 이용해 편법으로 실명전환을 하고 있고,현재의 추세로 봐서 차명예금의 실명전환은 극히 부진할 것으로 보인다.
○세정신뢰가 열쇠
차명계좌는 전체 예금계좌의 10% 정도로 추산되고 있는데 10월12일까지의 실명전환율은 3∼4%에도 못미칠 전망이다.
정부 관계자들은 『어차피 명의를 빌려주는 사람과 빌리는 사람이 짜는 합의차명은 선진국에도 있고 실명제가 정착돼가면서 차츰 줄어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쨌든 실명제의 조기정착을 위해서는 세정의 유연성과 정책의 신뢰성 확보가 우선돼야할 것으로 보인다.<김수길·길진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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