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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중국국경삼천리를가다>3.조선족 이산가족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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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백두산과 두만강.압록강을 끼고 있는 韓中국경지대에는 일제 36년과 한국전쟁 비극의 유산이 곳곳에 시름으로 남아있고 최근 韓中수교후로는 국경의 설움을 느끼며 사는 이산가족들의 고통이 커지는등 설움과 恨의 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같은 설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얀 갈매기떼들은 강위를 여전히 날고 있고 비릿한 바다 냄새는 여전히 해풍에 실려오고 있다.두만강 최하류에서 중국쪽 변경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2백50여㎞ 지점.일제시대 우리 선열들의 恨이 서린「間島■ 다.
두만강 한가운데지만 중국영토이기 때문에 일본의 탄압을 피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하던 선열들이 거쳐야만 했던 이곳은 이제 더이상 옛모습이 아니다.조그만 이 섬은 중국이 두만강에 제방을 쌓아 이미 육지가 돼 있었다.주변의 조선족들 만이 이곳을아직도 의미있는 땅으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조그마한 연못이 있다.지금도애창되는 「눈물젖은 두만강」이 탄생된 옛나루터 흔적이다.先代부터 이곳에서 살아온 한 조선족 노인(78)은 이곳의 옛 지명이「船口」이고 중국 용정과 조선의 종성을 잇는 곳 으로 많은 애국지사들이 중국으로 넘어가던 통로였다며「눈물젖은 두만강」의 유래를 말해주었다.
1935년 한 여름날,조선의 종성에서 한무리의 겨레가 배를 타고 선구로 건너왔고 그 속에 작사자 김용호도 끼여 있었다.나루터에서 슬피 울고 있는 한 여인을 발견한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사연을 물었다.독립군에 가담하려고 중국으로 떠 난 남편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나룻배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 왔으나 그가 도강후 남편이 일본 관헌에게 붙들려 옥사했음을 알고 통곡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용정지구로 돌아간후 그 여인이 밤새 나루터에서 통곡하다 두만강에 몸을 던졌다는 말을 들은 김용호는 복받치는 설움과 비극을시로 지었다는 것이다.
선구자들의 숨결이 깃든 용정시에서 다시「변경도로」로 가는데는그리 높지 않은 고개가 있다.이 고개는 19세기 중엽 우리 조상들이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 용정으로 갈때 두만강 일대에살던「오랑캐」들에게 시달려 조선족들에게는 지금 도「오랑캐령」으로 불리며,여기에 얽힌 숱한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굽이굽이 에도는 고갯길이 마치 우리 겨레가 걸어온 자국 같았다. ***恨서린 오랑캐嶺 이같은 한 서린 국경지대엔 지금도 우리민족의 슬픔이 가시지 않고 있다.
두만강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많은 조선족들이 이산가족이란 아픔을 간직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과의 국경지대를 끼고 있는 중국 길림성과 요령성 정부에 따르면 국경지대 주민 1백50여만명 가운데 40%인 60여만명이 조선족이다.
이들 조선족 가운데 5%인 3만여명이 백두산과 두만강.압록강건너 북한의 함북.양강도.자강도.평북등 국경지대에 부모와 자식을 둔「국경지대 이산가족」이다.
일제의 억압이나 6.25전쟁을 피해 강건너 중국땅으로 가 그대로 주저 앉거나 해방전부터 중국쪽에서 살다가 60년대 북한이잘살던때 건너갔으나 두나라 관계가 소원해져 다시 건너가지 못한경우등 이산의 사연은 갖가지다.
***생각못했던 離別 이들은 몇년 전까지만 해도 강을 건너 오가는 정을 나누었으나 공산권이 변한후, 특히 1년전 韓中 수교이후 서로의 만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북한당국이 북한주민들의 중국내왕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 앞 강 건너와 산 너머에 부모와 자식을 둔 제2의 이산가족들 가운데 일부는 혈육을 만나기 위해 도강하다 북한 경비병들에게 붙잡혀 수용소로 끌려가는등 처참한 일도 있다고 조선족들은 말한다.
또다시 두만강.압록강은 이곳 조선족에게 恨의 국경선이 되고 있는 것이다.
백두산 아래 압록강 상류 장백현에 사는 한 50대 동포는『동구가 붕괴되기 전인 87년까지만 해도 북조선의 감시가 지금처럼엄하지 않아 밤이면 서로 왕래하며 혈육의 정을 나눴고 젊은이들은 북조선 처녀들과 밀애를 속삭이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1년前부터 통제 그는 2년전까지도 강이 얼어붙는 겨울이면 강 건너 혜산시에 사는 아버지에게 손수건으로「강가로 나오라」는 신호를 보내 돼지고기등 음식과 쌀등 식량을 보자기에 싸 빙판위로 굴려 보냈으나 韓中 수교후부터는 강가에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 엄두도 못낸다면서 부모가 살고 있다는 혜산시쪽을 가리키며 눈시울을 적셨다.
두만강 중류의 소도시 白金에 사는 한 40대 조선족은『지난봄강 건너 북조선에 사는 칠순 아버지가 강을 건너와 아들집에 숨어 살다 중국쪽 교포들가운데 북조선 안전부와 내통하는「특무」의고발로 50여일만에 북조선 안전부요원에게 붙들 려 간 후 행방불명된 일도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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