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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서리 맞은 「무자료 거래」/실명제 몸살앓는 유통업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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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슈퍼·의류·도매상 매출줄어 “비명”/어음할인 어려워 연쇄도산 우려/구매심리도 “꽁꽁”… 엎친데 덮친격/전문가 “정착되면 개방대응에 촉진효과”
26일 0시 서울 남대문 시장 입구.
지방상인들을 태우고 도착한 관광버스에서 7명의 상인이 어깨가 처진채 차에서 내렸다.
한 상인은 『금융실명제 이전만해도 버스 한대에 30∼40명씩 타고와 물건을 사갔으나 무자료 거래가 어려워지면서 대부분 재고나 처리하고 신규구매는 포기하고있는 실정』이라고 털어놨다.
이에따라 남대문시장은 최근 도매거래 기능이 거의 마비돼 오전장이 썰렁한 상황이다.
「큰 손」이 덤핑값에 상품을 대량구입해 중간역할을 함으로써 운영되어온 덤핑시장(서울 용산전자상가,세운상가,동대문 의류상가 등)은 큰손들이 움직이기 어려워짐에 따라 상품유통이 거의 마비되다시피 하고 있다.
「삥시장」으로 불리며 가격체계를 문란하게 해온 서울 청량리·암사동·영등포의 식료품 무자료 도매상들에도 찬 바람이 불고있다.
○현금위주로 거래
청량리시장의 한 상인은 『사태추이를 관망하느라 대부분 상인들이 손을 놓고있다』며 『거래를 하더라도 현금만을 고집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 시장의 매출은 30% 안팎씩 줄고있고 상인들이 은행예금을 꺼려 인근 은행지점들도 돈이 들어오지 않아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이같이 금융실명제 실시로 무자료거래가 큰 타격을 입으면서 사실상 무자료 거래에 많은 의존을 하던 영세유통업계는 거래가 크게 위축되고 있다.
이광종 한국슈퍼체인회 전무는 이와관련,『대형업체들은 그나마 견딜수 있으나 영세업체들은 무자료 상품거래가 크게 위축되는 바람에 극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한국슈퍼마킷협동조합연합회에 따르면 우리나라 슈퍼마킷들은 파는 물건의 50% 정도를 제조업체나 도매상으로부터 무자료로 받아 팔고 있는 상태다.
일부 슈퍼업체 관계자들은 『그동안 서울 가락동시장내에 슈퍼마킷 상대로 무자료 상품을 전문으로 팔고있는 도매상으로부터 싼값에 사오고 있었으나 이나마 물건량이 줄어들어 가격이 오르고 있다』고 말한다.
「땡처리」 등 무자료상품 거래가 많은 의류업계도 거래가 위축되긴 마찬가지다. 코오롱상사 관계자는 『영세의류 판매업자들의 경우 유명브랜드 재고품의 특판을 하면서 유명브랜드 제품보다 30∼40% 싼 이름없는 회사의 무자료상품을 끼워팔아 이익을 남겼는데 절반이 중단된 상태』라고 말했다.
여기에 어음할인이 제대로 안되는 상황이 겹쳐 영세 유통업계에는 9월말 추적 전후나 10월12일 전후의 가·차명예금 실명화 시한무렵 연쇄도산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슈퍼마킷연합회의 허종기전무는 『전국의 3만개 슈퍼들의 평균매출이 실명제 실시이후 4∼5% 줄었다』며 『국민들 사이에 심리적인 불안감이 높아져 소비를 자제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풀이했다.
영세유통업체에 비해 비교적 자금여력이 있는 백화점업계도 이같은 「간접파편」에는 걱정이 많다. 한국백화점협회의 조용진 기획과장은 『실명제 실시로 큰 타격은 없으나 고가품이 잘 팔리지않고 있으며 대부분의 백화점들이 올 추석상품으로 예년보다 값싼 중저가 상품을 다양하게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로유통의 홍훈기전무는 『영세유통업체들이 아직은 있는 자금으로 당장 급한 돈은 막고 있으나 어음이 일시에 몰리는 시점에 예상밖의 불상사가 있을 수 있다』며 『정부·업계가 여기에 대처할 준비가 너무 안돼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고가품 잘 안팔려
상공자원부에 따르면 백화점부터 동네구멍가게까지 국내유통업체는 약 1백만개로 이중 95%가 구멍가게 수준의 영세업체라는 데서 문제는 심각하다.
자금난에서 오는 이같은 「직격탄」 못지않게 유통업계는 실명제 실시로 소비자들의 구매심리가 크게 위축돼 작년부터 계속된 매출부진의 골이 더욱 깊어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무자료거래가 전처럼 수월치 않고 받은 어음도 할인이 어렵기 때문이다.
겉은 현대식으로 차려놨지만 경쟁을 위해 한밤중에 무자료 상품을 들여놓기도 했던 일부 편의점(CVS)도 무자료거래를 끊고 있다.
금융실명제는 유통시장에 이같은 한파를 몰아치게 하고 있으나 긍정적으로 활용하면 낙후돼 있는 우리 유통산업을 근대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유통시장을 좀먹어온 무자료 거래가 크게 위축되면서 유통질서가 잡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며 유통정보화,물류센터의 건립 등 유통산업의 과학화도 앞당겨질 수 있다고 진단한다.
또 제조업체가 유통시장을 쥐고 흔드는 제조업 지배적 유통구조가 개선될 수 있고 제조업체가 대리점에 밀어내기 판매를 하기 어려워져 우리 유통산업의 취약점인 전문도매업체가 육성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즉 무자료거래라는 비정상이 정상으로 통해온 상행위가 개선되고 주먹구구 장사가 현대적 유통기업으로 변신해 외국 유통업체의 진출에도 대항력을 가질수 있게 되는 출발점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다만 유통업계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재래시장의 붕괴와 무더기 도태를 피하면서 유통근대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수순이 과제다,
슈퍼마킷협동조합연합회 장명기 사업부장은 『그동안 영세 슈퍼들은 현금동원력을 바탕으로 덤핑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판매하는 유사 연금매장이나 특수매장과 경쟁하기 어려웠으나 실명제이후 유통질서가 잡혀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정상적 거래를 하는 상인은 손해를 보는 변칙거래는 이익을 봤던 관행이 개선되게 되면 유통업계에 큰 변화가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지난 88년 전문도매업 운영을 시도했다가 무자료 거래 실태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한 진로유통의 홍 전무는 『무자료 관행 때문에 새로운 유통기법이나 새 업태를 해보려해도 안됐으나 이제는 유통업의 현대화추진이 쉬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상공자원부 김익만 유통산업과장은 『유통업계의 타격이 크기는 하지만 무자료거래의 퇴장으로 세금자료 노출이 어쩔 수 없어짐으로써 자료노출 우려때문에 지연됐던 유통정보화와 물류센터 건립이 활성화될 수 있다』고 예측했다.
○“세율인하 절실”
즉 판매시점 정보관리체제(POS)나 바코드 등 유통현대화 시설이 촉진돼 「감」에 의한 영업이 과학화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제조업체가 일일이 배달해 물류의 낭비가 되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집배송센터를 건립,여러 납품업체의 물건을 한꺼번에 배달하고 컴퓨터로 관리하는 시스팀으로 갈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당장 재래시장이 겪는 위기가 너무 크고 재래시장이 무너져서는 우리 유통산업이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영세 유통업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유통연구소 이범열소장은 『무자료 거래의 원인이 되고있는 영세 유통업체에 대한 과세표준을 인하와 10%로 선진국보다 높은 부가가치세율의 인하가 우선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또 『일본의 경우에 중소기업 지원을 한다고 하면 도·소매업에 60%가 가고 제조업에는 40%를 할당하고 있다』며 중소기업 지원책중 제조업만 지원하는 우리의 행태도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김일·오체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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