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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회담 사무국장|닫힌 마음 열기'대북 막후 주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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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통일원 남북 회담 사무국장은 남북 대화를 실질적으로 끌어가는 대부 문제의 야전 사령탑이다.
고위급(총리)·체육 회담 등의 대표는 대개 회담 사무국에서 짜놓은 대화 전략을 갖고 회담장에 나서기 때문이다.
회담 대표들이 북측 인사들과 마주하면서 협상을 이끄는 얼굴이라면 회담 사무국장은 그 막후 주역인 셈이다.
그러면서 회담 사무국장은 북측 전화 통지문을 받아 청와대·총리실·안기부 등 관계 요로에 전파하고, 남측 제의도 전달하는 대북한 창구이기도 하다.
또한 총리 등 각종 회담 대표에게 북측 파트너의 대화술 등에 대한 기초 교육까지 맡고 있다.
회담 사무국장은 그만큼 어깨가 무거운 자리다.
정부직급상으로는 1급이지만 그 밑에 싱크 탱크인 1급 자문위원 5명을 비롯한 1백63명의 대화 일꾼이 포진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
남북대화가 정권 안보용으로 둔갑했던 시절에는 회담 사무국장이 총리·통일원 장관을 제치고 대통령과 심심찮게 독대도 했다.
5공 출범과 함께 안기부에서 통일원으로 조직이 이관되면서 회담 사무국장은 안기부와 통일원의 「의붓자식」으로 적잖은 가슴앓이를 했다.
회담 사무국장의 첫 번째 임무는 역시 남북 대화에 관한 전략을 짜는 일. 북쪽에서 대화제의를 할 경우 자문위원·회담 협력관 등과 전략 심의반 회의를 갖고 제의 내용을 분석, 대응 전략을 짠다.
결정된 대응전략은 다시 청와대·안기부·외무부 등 관계 부처실·국장들로 구성된 전략기획단 회의(단장 통일원 차관)의 논의를 거친다.
최종적으로는 통일 부총리 주재의 통일 관계 장관 회의나 총리 주재 통일 관계 전략 회의에서 결정된다.
전략 심의반 회의 과정에는 특히 5명 자문위원들의 역할이 크다.
남북 대화 20년 사를 지켜본 대북 문제 전문가로 짜인 자문 위원들은 대화 전략 등에 노하우를 제공한다.
실제 회담이 열리면 분야별 회담 대표들에게 회담전략은 물론 대화술을 숙지시키는 일도 맡는다.
『북측이 회담 도중 갑자기 국가 보안법 철폐를 걸고 나오면 회담을 깰 의사가 있다고 봐야한다』는 것 등.
자문 위원들은 회담 직전에는 북측 대화 파트너가 되어 남측 회담 대표와 가상 연습을 진행한다.
판문점이나 서울에서 회담이 열리면 삼청동 남북 회담 사무국에서 최종 전략 회의를 갖고 회담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회담 사무국장은 전통문을 받는 즉시 전략 심의반 회의를 소집하고, 이를 관계 요로에 전파한다.
남북 회담 사무국은 71년 6월과 9월에 각각 발족한 중앙정보부 협의 사무국과 대한 적십자사(한적)사무국을 모체로 출발했다.
임시기구였던 협의 사무국은 72년 8월 다시 협의 조정국으로 개편됐고, 협의 조정국이 73년 5월 한적 사무국을 흡수 통합한 이후에는 협의국으로 운용돼왔다. 80년 10월 협의국이 통일원으로 넘어오면서 다시 남북 대화 사무국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지난해 10월에는 다시 현재의 남북 회담 사무국으로 개칭됐다.
71년 당시 강인덕 중정 북한정보국장(현 극동 문제 연구소장)이 겸임했던 협의 사무국은 그해 8월12일 대한적십자사 최두선 총재 명의의 적십자 회담 제의를 준비했다.
한적 사무국 (초대국장 육군소장 출신 장우주씨)은 남북 적십자 회담 지원을 위해 발족됐다.
이후 7·4 남북 공동 성명에 따라 남북 조절위가 가동되면서 72년 8월 발족된 중정 산하 협의 조정국이 본격적인 남북대화 업무를 맡게된다.
말하자면 협의 조정국이 현재 남북 회담 사무국의 실질적 전신인 셈이다.
초대 협의 조정 국장은 정홍진씨(현 송원 장학 재단 이사장).
정씨는 72년 3월 한적 회담 운영 부장으로 있으면서 공식적으로 처음 방북, 이후락(중정 부장) 김영주(노동당 조직 부장)간 평양 회담 및 이-박성철간 서울 회담의 산파역을 맡았다.
정씨는 71년 말부터 시작된 남북 적십자 회담이 답보 상태에 빠지자 당시 회담 석상에서 김덕현 북측 적십자 대표에게 『실세끼리 별도로 만나 협의하자』는 메모지를 건네 방북을 성사시켰다.
결국 정씨의 비밀 입북은 그해 5월초의 이후락-김영주간 평양 비밀 회담에 이은 7·4 남북 공동 성명을 끌어냈다.
이후 정씨는 남북 조절위 남측 간사로 북측 간사인 김덕현과 판문점에서 수시로 만나 남북대화에 대한 막후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72년 5월말 박성철(당시 내각 부수상)이 서울을 방문, 종로 「오진암」이라는 요정에서 음식을 접대할 때는 종업원들에게 그를 돈 많은 재일 동포로 위장시키기도 했다. 정씨는 70년대 초 남북대화 1기를 실질적으로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재임 기간은 2년8개월(72년8월∼75년4월).
정씨의 바통을 이어 받은 김달술씨 재임 기간 중에는 특별한 남북대화는 없었다. 김씨는 그러나 70년대 초 적십자 회담 대표로 활약하면서 합의문 작성에 일가견이 있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중정 협의 국장 후 공직을 떠났다가 84년 북한이 수재물자 제의 때 다시 롤백, 평양 고향방문단을 성사시키는데 한몫을 했다.
현재도 회담사무국 자문위원으로 활약중인 김씨는 북쪽 파트너로 나서 모의 회담을 하면 실제 북쪽인사 발언의 절반 정도는 넘게 맞추는 베테랑이다.
재임 기간은 75년 4월∼78년 10월이다.
이병호 3대 협의국장(남방 개발사장) 은 조직 관리에 능하고 인화에 남다른 수완을 발휘, 역대 국장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국장으로 꼽힌다.
78년 이대용 월남 공사가 억류됐을 때 송한호씨와 함께 송환 협상의 실무 주역을 맡았다.
10·26 사태가 터지면서 보안사에 끌려가 조사 받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재임 기간이 11개월 (78년10월 ∼79년11월)로 역대 국장 가운데 최단명이다.
중정 협의국은 이후 통일원으로 이관돼 이동복씨가 초대 남북 회담 사무국장을 맡게된다.
이씨는 재임 기간 중 전두환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82년2윌 민족 화합 민주 통일 방안을 입안했다.
70년대 남북 조절위 남측 대변인, 90년대 남북 고위급 회담 대변인 등 남북 정치 회담의「입」역할을 해왔으며 현재도 안기부장 제1특보로 고위급회담 대표역을 맡고 있다.
이씨는 업무 추진력과 순발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소신이 너무 뚜렷해 정부 내 다른 관계자들과 종종 마찰을 빚었다.
현재도 정부내의 대표적인 매파로 꼽힌다.
82년 2월부터 88년 3월까지 재직한 송한호씨는 84년 북한의 수재물자 제의로 다시 물꼬를 튼 남북 대화의 2기를 이끈 주역이다.
그는 안기부 출신이면서도 안기부 입김을 배제시키려고 숨은 노력을 기울여 안기부와는 껄끄럽게 지냈다는 평이다.
회담의 준비성이 강해 국내에 곧잘 비상이 걸리기도 했으며, 연설 준비를 할 때는 스톱 워치로 쟀을 정도로 치밀했다고 전해진다.
역대 최장수 국장으로 통일원 차관과 평통 사무 총장을 역임했다.
88년 3월부터 지난 7일까지 재직한 정시성 현 통일 연수원장은 재임 기간 중 8차례의 고위급 회담 등 가장 많은 남북 대화를 치렀다.
71년부터 22년 동안 남북 대화 업무에만 종사, 남북 대화의 산증인으로 통한다. <오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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