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로 중기는 불안하다|이종호 <평화 플래스틱 사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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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마치 작전을 펼치듯 금융 실명제가 전격 실시됐다.
이로 인해 중소기업이 어렵게 됐다며 자금 지원이다, 신용 보증 한도 확대다, 대출금 상환 연기다 하며 연일 대책 안이 쏟아진다.
최대한 지원해줄 터이니 중소기업들은 동요하지 말고 기업 경영에 전념하라는 뜻이겠지만 중소기업인의 입장에서는 왠지 불안감을 감출 수 없다.
시기가 부적절해서도 아니며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책이 모자라서도 아니다. 비실명 금융 자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흔치 내세우는 「실명제 하려다 우리 경제가 흔들린다」식의 교각살우론을 뒤늦게 되풀이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 회사는 그나마 탄탄하다는 소리를 듣고 있고 비자금용 가명 계좌도 없으며 직원들이 가진 통장이래야 급여 이체 통장과 대출금 상환 통장뿐이다.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 자신은 실명제가 반드시 실시돼야 한다고 믿어왔다.
문제는 「불확실성」이다. 실명제의 실시 배경 중의 하나도 「우리 경제의 불확실성을 없애기 위해서」였지만 중소기업인들에게는 불확실성이 오히려 커졌다. 실명제 실시 이후의 청사진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정작 중소기업을 위한 종합 대책을 마련해야할 상공자원부 등 많은 정부 부처가 정책 수립 과정에서 제외됐었고 뒤늦게 이를 떠맡아 종합 대책을 마련하느라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긴급 자금을 지원한다지만 아직까지는 어디서 어떤 절차로 얻어 쓸 수 있는지 대답도 제 각각이다. 정부 관계자 누구에게 물어봐도 확실한 답변을 못해주고 있고 그동안 어쩔 수 없이 사금융 등 변칙적인 방법으로 버텨온 중소기업들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 지에 대한 비전 제시는 더욱 없다.
세상엔 전격적으로 하지 않고는 안 되는 일이 적지 않고 금융 실명제야말로 그 대상의 하나다. 하지만 앞으로 전격 실시를 할 때에는 제발 이 전격 실시가 몰고 올 영향과 파장을 미리 생각해서 이에 대한 대책과 비전 제시도 함께 준비했다가 터뜨려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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