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모르는 고통 이젠 떨치세요"|사회 단체·학원 등 4곳서 「한글 강좌」 내달 문열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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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한글을 몰라 남몰래 고민하는 여성들은 오십시오.』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한글 강좌가 9월부터 서울에서는 사회 단체 4곳과 수도학원 등에서 일제히 개강된다. <표 참조>
9월 개강이 확인된 사회 단체는 지난 15년간 15세 이상 문맹 여성들을 상대로 한글 교육을 펴온 한국 여성 생활 연구원을 비롯해 시립 보라매 청소년 회관·여성 신문 교육 문화원·신월 종합 사회 복지관 등.
이들 단체의 교육 경험에 의하면 수강한 사람들은 40∼70대의 중년 이상이 주류를 이루나 30대 이하 젊은 층도 뜻밖에 많다.
연중 한글반을 운영하고 있는 수도학원의 경우 현재 초급·중급·고급반으로 나뉘어 있는 한글반 수강생 약 5백명 (남자 13%·여자 87%) 가운데 39세 이하 젊은 층이 41%에 달한다.
또 한국 여성 생활 연구원 (원장 정찬남)이 올 들어 지난 3∼5월과 6∼8월 두차례에 걸쳐 열어온 3개월 과정의 성인 한글 학교 수강생 3백74명 가운데 8·15해방과 6·25를 겪은 40대가 34.8%로 가장 많았으나 20∼30대도 28% (20대 1.3%)나 됐다.
배움의 기회를 놓친 이들의 만학 열기는 젊은 학생들 못지 않게 뜨겁다.
한국 여성 생활 연구원 한글 강사 박진숙씨 (28)는 『극력 반대하는 남편을 설득, 지방에서 올라와 사글세방을 얻어놓고 한글을 공부하는 주부를 비롯해 가정 사정으로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주부들을 보면 가슴이 뜨거워 질 정도』라고 했다.
이들은 유치원·국민학교에 갓 들어온 어린이들처럼 지우개·연필·필통을 착실하게 챙겨와 강사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난생 처음 불러보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신기해하기도 한다.
한글을 모르는 이들이 그동안 주변 사람들 몰래 겪은 마음 고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시립 보라매 청소년 회관에서 5∼7월 한글을 배운 한 30대 여성은 결혼 후 한글을 모르는 사실이 드러나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에게 무시당하다 결국 이혼했다며 문맹으로 겪은 쓰라린 경험을 털어놓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동사무소·은행 등에서 서식을 쓰지 못하는 바람에 애를 먹는가 하면 자녀들이 뭘 물어올 때 『아빠에게 물어 보라』고 떠넘기며 한없는 의로움을 느끼는 등….
이처럼 갖가지 고초를 겪으면서도 망설이는 사람들이 많다. 수도학원 교무부장 진경범씨는 『학원에 열번 이상 찾아와 둘러만 보고 말을 못한 채 돌아갔다 6개월만에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도 있으며 집에서 공부하다 누가 들어오면 책을 감춘다고 털어놓는 등 부끄럼이 많다』고 전했다.
그러나 관계자들은 『못 배운 원인인 가난과 가정 불행이 죄가 아닌 만큼 지금이라도 용기를 내 한글을 깨우칠 것』을 권했다. <김영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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