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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디터칼럼

금산분리냐 금산공조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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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나그네 갈 길은 먼데 서산에 해가 지는 심정이다.” 3일 퇴임한 윤증현 전 금융감독위원장이 남긴 한마디다. 그는 외환위기의 산물인 금융감독원 출범 이후 최초로 3년 임기를 마쳤다. 국회의원 같은 선출 직이 아닌 임기 직 가운데 무사히 임기를 채우고 공직을 떠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임기를 마친 공직자가 축하를 받는 것도 그런 현실을 반영하는 의미일 터이다. 그럼에도 윤 전 위원장은 무엇이 그리 아쉬웠을까.

퇴임 직전 본지에 털어놓은 얘기에 따르면 그는 이른바 ‘금산(金産)분리’를 완화하지 못한 것을 가장 아쉬워했다.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을 분리한다는 금산분리는 그동안 금융산업을 관리해 온 정부 정책의 중요한 골격이었다. 재벌이 은행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막아 놓고 거꾸로 금융자본도 기업 주식을 일정 비율 이상 보유할 수 없도록 제한해 왔다. 특히 재벌의 은행 소유를 막는 내용이 핵심이다 보니 금산분리를 완화하자는 주장은 곧바로 ‘재벌 편들기’로 간주돼 왔다. 금산분리는 일종의 성역이었던 셈이다.

윤증현 전 위원장의 3년 임기 가운데 가장 빛나는 대목은 그가 바로 이 성역에 도전했다는 점이다. 그는 공개 석상이나 언론을 통해 공공연히 금산분리 완화 문제를 제기했다. 석 달 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금산분리는 범위와 강도 면에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세다. 국내 자본에 대한 역차별을 막기 위해서도 금산분리는 완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퇴임 직전에도 “금융자본은 하루아침에 육성되지 않는데 산업자본이 은행을 소유해선 안 된다고 대못질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지적했다. 권오규 부총리나 재경부 관계자들이 금산분리 완화에 완강히 반대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행보가 아닐 수 없었다.

윤 전 위원장이 금산분리 문제에 조바심을 낸 표면적인 이유는 내년으로 닥친 우리은행 민영화 때문이다. 우리은행의 주인 격인 우리금융지주는 관계 법령에 따라 내년 4월까지 민영화하도록 규정돼 있다. 주식 분포만 놓고 본다면 우리은행은 시중은행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토종 은행이다. 6월 말 현재 국내 7대 시중은행의 외국인 지분율은 73.6%에 달한다. 3개 은행은 외국 자본이 경영을 하고 있다. 금산분리 원칙을 고수할 경우 우리은행 역시 외국인 수중에 넘어갈 확률이 매우 높다. 국내에선 10조원이 넘을 우리금융지주의 주식 인수 비용을 감당할 만한 금융자본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윤 전위원장은 금산분리 완화를 이끌어내진 못했지만 공론화에는 성공했다. 최근 들어 금융계와 재계·학계를 중심으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으며, 지난주에는 신학용 의원 등 14명의 국회의원이 금산분리 정책을 폐지하는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금산분리 정책의 골격이 쉽게 무너질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아직은 반대론의 목소리가 더 커 보이는 데다 재경부나 청와대가 꿈쩍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과거 은행 돈을 빌려 문어발 경영을 일삼다 부도를 내는 바람에 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던 대기업들의 실패 사례가 원죄처럼 남아 금산분리 원칙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을 보낸 지금 상황은 너무나 달라졌다. 현금을 쌓아두고 투자처를 찾고 있는 대기업들은 이제 은행에 과거처럼 무작정 손을 벌릴 일이 없다. 그동안 조선이 세계 1위, 휴대전화는 세계 3위, 자동차는 5위 수준의 경쟁력을 갖췄지만, 금융업의 경쟁력은 아직도 세계 30위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금산분리 원칙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당장 ‘삼성은행’ ‘현대은행’을 만들자는 얘기가 아니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기업의 자본과 인력, 노하우를 활용할 수 있게끔 ‘금산공조’의 길을 찾아봐야 한다. 언제까지 미룰 일이 아니다. 서산에 지는 해를 아쉬워한 윤 전 위원장의 한마디가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손병수 경제부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