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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의 전쟁, 무관심의 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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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금 우리는 ‘관심의 전쟁’ 중이다. 오늘 현재 한국 사회에서 관심의 최전선은 남북 정상회담과 영화 ‘디 워’다. 하나는 오프라인에서, 또 하나는 온라인에서 보다 강세다.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인질로 억류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하룻밤 사이에 폭락했다. 신문도 방송도 인터넷도 하루아침에 기사가 바뀌었다. 놀라운 속도다. 그런가 하면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든 말든 온통 관심의 초점은 영화 ‘디 워’에 쏠려 있는 듯싶다. 한쪽에서는 찬사가 또 다른 한 쪽에서는 경멸이 쏟아지는 영화 ‘디 워’는 적어도 인터넷에서는 가위 ‘관심의 블랙홀’이다.

 이런 와중에도 정치권에서는 이명박 후보 측과 박근혜 후보 측이 서로 물고 뜯는 한나라당 경선이 계속되고 있지만 경선 일자가 다가옴에도 관심은 이래저래 많이 준 느낌이다. 또 범여권에서는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하고 나흘 만에 다시 열린우리당과의 합당을 공식화했다지만 사람들은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게다가 9일 대선 출정식을 한 손학규 전 지사는 잡는 날마다 일 터진다는 측근들의 푸념처럼 그 전날 발표된 남북 정상회담 소식 때문에 아예 광이 나지 않았다. 턱수염까지 말끔히 깎고 나섰는데도 말이다. 어찌 보면 ‘관심이 생명’인 정치권이 요즘에는 관심의 전쟁에서 최전선이 아닌 최후방으로 밀린 느낌이다.

 관심의 전쟁은 총칼로 피 터져라 싸우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참화를 초래한다. 바로 ‘무관심의 참화’가 그것이다. 남북 정상회담 소식이 알려지면서 아프가니스탄에 인질로 억류된 사람들의 가족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인질들의 생사 여부는 말할 것도 없고 아예 사람들 뇌리에서 최소한의 관심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우려해서다. 사실 그것은 기우가 아니다. 실제로 남북 정상회담 소식이 알려지면서 탈레반에 억류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급속도로 사그라졌다. 한마디로 ‘관심의 전쟁’의 최전선이 아프가니스탄 인질 억류 사태에서 남북 정상회담과 영화 ‘디 워’로 옮겨간 까닭이다. 그러자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 인질로 억류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말 그대로 ‘무관심의 참화’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특히 대통령 특사로 아프가니스탄에 갔다던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이 8일 오전 2차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 사실을 발표하는 모습을 TV로 지켜보면서 가장 황당했을 사람들은 다름 아닌 아프가니스탄에 억류된 인질들의 가족이었을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러 갔다는 대통령 특사가 단 한 명의 인질도 살려내지 못하고 이렇다 할 대안조차 없이 슬그머니 입국하자마자 아프가니스탄 인질 억류 사태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함구한 채 텔레비전에 얼굴 내밀어 남북 정상회담 소식을 알리면 대체 어쩌자는 건가. 도대체 아프가니스탄에 간 것은 거죽이고 실제 속마음과 속생각은 온통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콩밭에 가 있었다는 말인가.

 사건이 사건을 덮는다는 말이 있다. 신문 지면과 방송 뉴스 시간도 한정돼 있고 인터넷 포털 전면에 노출될 수 있는 것도 제한이 있다. 그러다 보니 어제의 사건보다 더 큰 사건이 터지면 앞의 사건들은 덮여 버리고 만다. 하지만 정부에서마저 사건이 사건을 덮어서는 안 된다. 하나라도 제대로 매듭짓겠다는 각오로 해야 한다. 빌라도가 손 씻듯이 “나는 이제 모른다. 지금 내 앞엔 새 과제가 있다”고 한다면 정말 곤란한 일이다.

 장마가 끝나고도 퍼붓다 개었다 하는 알 수 없는 날씨마냥 관심의 기상도는 예측불허고 관심의 최전선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이 ‘관심의 전쟁’ 뒤편의 ‘무관심의 참화’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논설위원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