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지도력 달려 불명예 퇴진/비운의 미야자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탁월한 이론가… 행동은 우유부단/「PKO」·잇단 스캔들 결단 못보여
미야자와 기이치(궁택희일) 일본총리의 퇴진은 일본정계에서 전후를 아는 마지막 정치가가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등 일본 전후 정치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관료 또는 정치인으로 직·간접으로 관여했던 인물이다.
그는 보수본류로 평화헌법·미일 안보조약·전후 냉전체제에서의 질서라는 틀안에서 행동하는 정치가로 통했다. 그러나 우수한 능력과 이론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관료출신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행동력·지도력 결핍으로 결국 38년간 유지돼온 자민당 1당지배를 종식시키는 비운의 정치가가 되고 말았다.
그는 집권기간 내내 부정스캔들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편안할 날이 없었다. 자신이 속한 파벌간부를 구속으로 몰고간 철골회사 공화사건,수많은 의원이 관여된 도쿄사가와규빈(동경좌천급편) 부정헌금사건,자신의 버팀목이던 가네마루 신(김환신) 전 자민당 부총재의 은퇴 및 탈세혐의 구속 등 스캔들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그는 또 가이후 도시키(해부준수) 내각이 물려준 정치개혁·자위대의 유엔평화유지활동(PKO) 파견 등 큰 이슈를 해결해야 하는 짐까지 져야했다. 이같은 이슈들은 그에게 강력한 지도력과 정치적 결단을 요구하는 것들이었다.
그는 그러나 당내기반이 약한데다 지도력 부족으로 파벌의 두꺼운 벽앞에서 당내 실력파들에게 이리저리 휘몰리다 자민당 분열로 55년체제를 종식시키는데 일조하고 물러나는 정치가가 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을 총리로 만들어준 가네마루에게 모든 당무를 맡기고 행정에만 전념하겠다고 선언,정칙적 결단을 요구하는 정치적 과제를 수수방관했다.
그의 이같은 자세는 민주정치 지도자로서는 분명히 좋은 덕목이다. 그러나 총리로서는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최후까지 볼투명한 자세로 일관했다.
언론은 정치기반이 약한 그에게 『국민에게 직접 호소,여론을 등에 업고 정치를 자신의 소신대로 하라』고 수차 다그쳤으나 그는 당내 파벌 역학관계에 의존하며 안주했다.
그는 논리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논리를 펴기보다 흐름을 봐가며 최대파벌인 다케시타파가 하자는대로 따르는데 그쳤다.
예컨대 그는 자위대의 해외파견은 위헌이라는 논리를 펴왔으나 결국 당 방침대로 PKO 파견을 지지하고 나섰다.
미야자와 총리는 가네마루 구속과 다케시타파 분열로 잃었던 지도력을 되찾아 자신의 진짜얼굴을 나타낼 수 있는 호기를 맞았으나 이마저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놓치고 말았다.
그가 임기중 지도력을 발휘해 달성한 것은 ▲2차례에 걸친 약 20조엔 규모의 경기부양책 ▲아시아중시외교의 일환으로 취임후 한국 첫 방문 ▲미일 포괄협의의 장 마련 등을 꼽을 수 있다.
그 결과 도쿠가와(덕천)막부의 마지막 15대 쇼군(장군) 요시노부(경희)처럼 비운의 정치가로 자민당 1당지배의 막을 내리게 됐다. 자민당 1당지배를 종식시켜 일본정치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을 그의 공으로 친다면 지나친 말일까.<동경=이석구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