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굴레 그려 잔잔한 파문|신예 여류 작가 공선옥씨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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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우리 시대에도 여전한 여성의 굴레와 그 비극을 다룬 신예 여류 작가의 장편소설이 조용히 읽히며 문단의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달 출간된 공선옥씨 (30)의 첫 장편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 (삼신각 간)이 한달 남짓에 7천권 가량 팔리며 독자들에게 여성의 원초적 굴레를 보여주면서 현대와 구습의 거리를 묻게 하고 있다.
『온갖 맛있는 것들, 풍선껌·사탕·얼음과자를 사주지 않는 엄마가 미워 섧게 울던 아이는 잠들었습니다. 설운 아이의 곁에 설운 엄마가 더 이상 설워하지 말자고 일기를 썼습니다.
샛별은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일기를 쓰는 머리 위에서 반짝였습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어미의 절대적 종교이듯 글을 씀은 내 삶의 종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설운 애 엄마가 일기 쓰듯 창작한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은 나이 30세에 비극의 절정에 이른 두 여자의 삶을 비장하게 다룬 반자전적 소설. 은이와 채옥은 같이 오지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다. 머슴의 딸 은이와 중농의 딸 채옥은 지주의 아들 상훈을 사이에 두고 갈등을 빚는다. 졸업 후 채옥은 지방 대학으로, 은이는 서울의 공원으로 떠난다.
상훈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와 같이 지내려 서울의 대학으로 옮기려던 채옥은 부랑자 기현한테 성폭행 당하고 그의 애까지 낳는다. 운동권으로 위장 취업한 상훈은 공단에서 자신의 집 머슴 딸 은이와 만나 결혼한다. 채옥은 기현의 폭력과 가난을 피해, 은이는 임신한 몸으로 시댁을 찾아 고향 오지리에서 다시 만난다.
그러나 머슴 딸 며느리라 시댁으로부터 밑도 끝도 없이 멸시받던 은이는 급기야 시댁 고용인으로부터의 겁탈 위기까지 넘기고 그와 상훈을 이어주던 유일한 끈인 애를 유산한다.
서울에 남은 상훈에게 또 다른 여자가 있음을 안 은이는 오지리 시댁을 정처 없이 떠나버린다. 죄의 씨앗이지만 죄 없는 아이를 위해 오지리에 온 채옥은 거기서 온갖 잡일을 하다 급기야 기현이 있는 폭력과 절망의 세월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오지리를 떠난다는게 소설의 줄거리다.
남자에게 철저하게 당한 이 시대를 사는 두 여자의 비극적 운명을 보여주면서 공씨는 특유의 남도 정서 넘치는 표현에 힘입어 예나 지금이나 여성의 굴레는 운명적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머슴 딸과 결혼함으로써 운동의 순수성을 완성하려다 끝내는 차버린 상훈의 낭만적 허위를 통해 80년대 운동권의 이상적 허위도 반성해보고 있다. 91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문단에 나온 공씨는 92년 『장마』로 여성 신문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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