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전 석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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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한국 프로바둑이 마침내 세계4대기전을 석권,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지난 3일 일본 오사카에서 두어진 제6기 후지쓰배 준결승에서 한국의 조훈현9단과 유창혁6단이 일본의 가토 마사오 9단과 아와지 슈조 9단을 극적인 반집차로 누르고 나란히 결승에 진출함으로써 금년들어 「진노배」「응씨배」「동양증권배」를 차례로 우승한데 이어 마지막 남은 「후지쓰배」마저 차지하게 된 것이다.
최근 수년동안 한국 프로바둑은 무서운 기세로 세계무대를 누비면서도 유독 일본이 주최하는 후지쓰배만은 조훈현 9단의 3위 입상이 고작일 정도로 인연이 닿지 않다 드디어 맺힌 한을 풀고 명실상부한 세계정상의 위치에 우뚝 섰다.
이러한 쾌거는 바둑선진국임을 자부하던 일본으로서도 누려보지 못한 일이다. 그들은 오직 후지쓰배만의 안방챔피언 노릇을 해오다 그마저 한국에 빼앗기고는 초상집과 같은 침통한 분위기에 빠져 있다.
경제대국 일본을 완벽하게 무릎 꿇린 분야가 바둑 말고 또 있을까. 다른 나라와는 달리 국고보조 한푼 방지 못한 천덕꾸러기 문하단체 한국기원이 스스로 대견해 보이는 오늘이다.
그런데 이번 후지쓰배 우승확보에는 이창호6단의 공로가 없지 않다는 느낌이다. 그는 후지쓰배에 불참하면서까지 조치훈9단과의 동양증권배 결승 5번 승부에 전력투구한 결과 3대0이란 일방적 전적으로 우승했다. 이 과정에서 페이스가 흔들린 조9단이 아와지9단과의 8강전에서 다 이겨놓은 판을 자멸했던 것.
유창혁 6단에겐 조9단이 거북한 상대다. 어쩐 일인지 그와 마주치기만 하면 맥을 못써왔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조치훈 아닌 아와지와 싸우게된 것이야말로 유창혁의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이창호의 간접공로라는 얘기다.
조훈현·서봉수·이창호·유창혁을 흔치 「4인방」이라 부른다. 이들의 세계대회 우승경력을 살펴보면 서9단이 동양증권배와 응씨배 각 1회 우승으로 가장 앞서며, 이 6단이 동양증권배 2회 우승, 조9단이 응씨배 1회 우승을 차지했으나 유6단만 아직 우승경력이 없다.
한·중·일의 단체전인 진노배에서는 한국팀이 2연패를 달성했거니와 여기서 유6단은 선봉장으로 출전해 3연승과 2연승으로 우승의 견인차 역할을 했고, 서9단과 주9단은 한번씩 끝내기승리로 우승을 확정지은바 있다.
과연 유창혁이 세계기전의 우승자로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조훈현이 우승경력을 추가할 것인지 8월7일 일본도쿄에서 두어질 후지쓰배 결승대국에 팬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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