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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측근세력-당 기관②|최태복·김용순 대외 양 날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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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당기관내의 김정일 측근가운데 북한의 외부세계와의 관계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최태복· 김용순도 최근 급 부상하는 주요인물이다.
최태복은 현재 당정치국 후보위원 겸 당비서(국제담당)다.
「교육통」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지난해말 김용순에 이어 국제부문을 맡음으로써 활동무대를 외교 쪽으로 바꿨다. 김용순이 비서국내에서 대남 사업을 관장하게된데 따른 자리바꿈이었다. 당초 대남 비서이던 윤기복은 최태복 자리인 과학교육부문을 책임지게 됐다. 즉 비서국 안에서 최태복·김용순·윤기복의 업무가 뒤바뀐 것이다. 김정일이 대남·외교분야를 더욱 확고히 관장하려는 뜻에서 자신의 측근들에게 이 분야를 맡겼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최태복의 외교무대 담당은 우연은 아니다. 그가 북한의 교육대표단장 자격으로 남달리 해외파견 경험이 많았던 사정이 작용했음직하다. 정무원 교육위원장시절에 그는 구 소련·중국·동독 등 사회주의국가 뿐 아니라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 수단을 비롯한 아프리카국가, 인도 등 아시아국가들을 광범위하게 친선 방문했었다. 당비서가 된 뒤에도 노동당 대표단장자격으로 서아프리카·프랑스·서독·시리아·이집트·중국 등을 방문한 사실이 확인된다. 지난해까지 김용순이 그랬듯이 최태복은 요즘 김일성과 함께 노동신문 1면에 얼굴이 가장자주 등장하는 인물이 됐다.
1929년 함북 길주에서 태어난 최태복은 항일 빨찌산으로 전사한 아버지 덕에 해방 후 만경대 혁명학원을 거쳐 김일성 종합대학과 동독 라이프치히 공대를 마쳤다. 1959년 귀국한 그는 당과 학교교육부 지도원으로 간부생활을 시작했고 61년에 함흥화학공대 교수로가 한때 연구직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는 화학분야 전문가이자 당정의 교육 테크너크랫이다. 그가 김정일 측근으로 부상된 것은 73년 무렵이다. 당 중앙의 학교교육부 과장시절에 학생들 속에서 「김정일 유일지도 체계」확립에 기여한게 계기였다. 김정일의 교육관련 지시들, 이를테면 ▲학생 과학기술수준 제고 ▲1만 페이지 독서운동 전개 ▲외국어교육 강화 등에 힘 쏟아 눈에 들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유일지도 체제 확립에 요구되는 사상교육과 동시에 과학기술교육에 주력했던 것이다.
교육분야에서 김정일 후계체제를 구축하는데 일등 공신이었던 만큼 김정일의 권력기반이 단단해진 86년 말 당직개편 때 당 중앙위원 겸 비서로 전격발탁 돼 노동당의 중추인물로 떠올랐다.
한편 김용순은 지난해 말 당정치국 후보위원이 됐으며 대남 비서로 자리를 옮긴 뒤엔 동정이 잘 잡히지 않고 있다.
1934년 함북 회령에서 태어난 그는 김정일의 외가 쪽 인척으로, 촌수는 멀지만 워낙 외가친척이 드물어 중시됐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김정일이 외가친척에 남다른 관심을 쏟아왔기 때문이다.
김용순은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한 뒤 2년간 모스크바대학에 연구원으로 유학했으며 56년에 귀국해서는 당 중앙의 국제사업부 지도원으로 간부생활을 시작했다..
김정일은 그가 승진하면 오메가 금시계를 따로 선물하는 등 다른 사람과는 달리 대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용순은 만성심장병 때문에 건강이 좋은 편은 아니라고 한다. 거의 10년간 지방 인민위원회에서 일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가 이집트대사로 나간 것도 그의 건강을 걱정한 김정일의 배려 때문이란 얘기다.
1970∼72년 이집트주재대사를 거쳐 73년에 대외문화 연락위원회 부위원장이 된 그는 각국과 문화교류협정에 조인하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대외문화 연락위원회의 일을 맡은이래 그는 가장 자주 해외로 파견된 인물의 하나였다.
동유럽, 서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중동 등 세계도처를 돌아다닌 경험이 평가돼 자본주의 국가와의 외교를 맡게된 것으로 관측된다.
그가 국제부문의 쟁쟁한 실력자들을 제치고 76년에 국제사업부 부부장으로 전격 발탁된 것이나 84년 2월에 국제비서·국제사업부장으로 급 부상한 것은 김정일의 후광에 힘입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돌연 85년 8월에 국제부 제1부 부장으로 떨어져 그는 안팎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당시 정무원 외교부장 김영남과의 불화설이 나돌기도 했으나 88년 12윌 국제부장 복귀가 판명된 이래 불화설은 꼬리를 감췄다. 그는 92년 4월에 허담 사망(91년5월)이후 공석이던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으로 선출됨으로써 명실공히 베테랑 외교 테크너크랫 김영남과 함께 북한외교의 쌍두마차가 됐다.
김용순이 국제비서일 때 외교위원장을 맡았듯이 지금은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에 따라 외교위원장은 최태복에게로 넘어갔다.
김용순이 대외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90년9월 일본자민당의 가네마루 신과「조일 관계에 관한 공동선언」을 이끌어 내는데 산파역할을 했을 때와 91년 2월 일본을 공식방문, 북-일수 교 회담을 본격화시켰을 때였다.
92년 1월에는 미국을 방문해 아널드 캔터 국무부 정무담당차관과 북-미 수교 논의를 벌여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당시 김용순은 북한지도자론 보기 드물게 세련된 매너와 화술로 이목을 끈바 있다. 그가 대남 사업을 맡은 것은 남북관계에서 어느 때 보다 미국·일본 등 주변국가와의 관계가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그가 대남 사업을 관장하게된 만큼 이에 대한 김정일의 지도력이 강화될 것으로 예측된다. <통일부=김국후차장·유영구-오영환기자>

<김용순>
▲70년 8월∼72년 2월 주 이집트대사
▲76년 국제사업부 부부장
▲80년10월 당 중앙위원
▲85년8월 국제사업부제 1부 부장
▲88년12윌 당 국제부장
▲89년11월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부위원장(위원장 허담)
▲90년5월 국제담당 비서
▲92년4월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
▲92년12월 당 정치국 후보위원(그 뒤 대남 비서)
▲93년4월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장

<최태복>
▲61년 함흥화학공대 교수
▲65년 과학원 함흥분원화학연구소장
▲68년 함흥화학공대 교수부장
▲72년 당 과학교육부 과장
▲76년 부부장
▲78년 정무원 고등교육부장 겸 교육위 부위원장
▲80년12월 정무원 교육위원장
▲86년12월 당 중앙위원 겸 당비서
▲90년5월 당정치국 후보위원
▲93년4월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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