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극복 수기 공모전 대상 받은 정점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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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기 자궁암 환자인 정점례(54·여·서울 송파동·사진)씨는 요즘 길을 걷다가 키 작은 나무가 팔에 걸리면 걸음을 멈추고, 나뭇가지를 원래 대로 가지런히 정리한다. 지난해 초만 해도 나 몰라라 했단다. 정씨는 암 선고를 받은 후 세상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지난해 가을 잠실사거리를 지나는데 꽃이 하나 폈더라고요. 낙엽 지는 계절에 꽃이 핀 것이 힘내라는 메시지 같더라고요. 요즘엔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햇빛 한 조각에도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정씨는 8일 보건복지부가 주최한 암 극복 수기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정씨의 삶은 아름다운 서정시 같지는 않았다. 첫번째 시련은 결혼 14년째인 1990년 갑자기 다가왔다. 종로에서 식당을 하던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길로 남편은 말 한 마디 못하는 식물인간이 됐다. 정씨는 남편의 병상을 한 순간도 떠날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99년 자신에게 자궁경부암이 찾아왔다. 조기 발견돼 치료가 어렵진 않았지만, 산부인과 병실이 아닌 남편이 누워있는 외과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남편을 돌볼 사람이 없어서다. 일주일 만에 퇴원했다. 한푼이라도 벌어보려고 한 장에 5원씩 하던 물수건 포장 일도 했다. 하지만 외환위기는 이 소박한 일거리마저 뺏아갔다. 시련은 계속됐다. 지난해 6월 걷지도 못할 정도로 앓았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정밀 검사 결과가 나왔다. 이미 자궁을 들어냈는데 자궁 주변 조직에 암이 생겨 췌장과 림프선으로 번졌다는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그 순간에도 정씨는 남편을 떠올렸다.

“내가 남편보다 먼저 가면 안 되는 데, 나의 짐을 자식들한테 넘겨서는 안 되는 데….” 아픈 남편이,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넬 수 없는 그 남편이 정씨에게는 힘이 됐다. 치료를 시작했지만 항암 치료는 고통스러웠다. 자살의 유혹에 시달리다가 남편 얼굴이 떠오르면 마음을 다시 잡았다.

49일 동안 입원 치료 후 남편 옆으로 돌아온 날, 말 못하는 남편은 수십 번의 딸꾹질로 아내를 맞았다고 한다. 그랬던 남편이 올해 초 세상을 떠났다. 삶의 버팀목이 사라진 정씨는 절망했다. 항암치료도 중단했다. 이번에는 세 자녀가 손을 내밀었다. 정씨는 다시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정씨는 12번의 항암치료를 견뎌냈다. 서울 송파동 집에서 일산 국립암센터까지 지하철을 갈아타며 2시간이 걸리지만 힘을 내고 또 냈다. 정씨는 “한 달 전 항암치료를 같이 받았던 환자가 다음달에 보이지 않으면 가슴이 무너지는 듯하다. 그래도 남편 몫까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용기를 낸다”고 말했다. “내 투병기가 다른 환자들에게 작은 희망이 됐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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