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유학시험을 치른 남산 과학박물관 자리에 들어선 어린이 회관.
내심 ‘해외에 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싶었다. 석사과정을 지도해주던 오현위(작고) 교수도 “조군, 대학에 남아 교편을 잡으려면 해외에 한번 나갔다 와야 해”라고 자주 말하곤 했던 터였다. 연수 형식을 빌어 해외 바람을 쐬고 오건, 학위를 해오건 간에 대학에 남으려면 해외 경험이 중요한 경력으로 작용하던 때였다.
그 당시 해외에 나가는 것은, 더구나 장학금을 받아가면서 간다는 것은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 국내 대학 중 유일하게 서울대 교수들은 미국의 원조를 받아 한번씩 미국 연수나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귀국하고 있었다. 그 프로그램은 서울대 교수들 중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거의 없어 그 수준을 높여야 겠다는 미국의 배려로 추진됐었다.
서울 정릉 집에서 아침을 먹자마자 한 달음에 응시원서를 준다는 남산 밑 과학박물관으로 갔다. 남산초등학교 시절 수 없이 다니던 길이라 과학박물관 위치는 손금보듯했다.그러나 막상 그곳에 도착했으나 기대는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응시 원서를 배부하는 날로 알고 갔으나 사실은 시험을 보는 날이었다. 벌써 시험은 15분이나 지났다. 고사장을 들여다 보니 30여명이 시험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허탈한 심정을 쓸어안고 과학박물관을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어이 총각, 기왕에 왔으니 시험이나 보고 가지 그래.”시험 감독관의 말이었다.
“벌써 시험이 시작됐고, 연필이고 뭐고 아무 것도 준비한 게 없는데…”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어쩔 줄 몰라하자 시험 감독관은 필기 도구까지 빌려주며 시험을 보게 해줬다. 생면부지의 시험 감독관의 배려로 나는 스웨덴 행 티켓을 잡을 수 있었다. 그 때 시험을 본 사람 중 서너명이 붙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해 9월 스웨덴 웁살라 대학으로 연수를 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가끔 수능 시험장에 약간 늦게 도착해 응시도 못해보고 돌아서는 학생들을 신문에서 볼 때면 그 때 생각이 난다. 세상이 야박해진 건지, 그 때가 허술했던 건지 모르겠다.
1978년 미국 캘리포니아대 로스엔젤러스 캠퍼스(UCLA) 부교수에서 UC샌디에고대학 부교수로 막 자리를 옮기고, 한국과학원(현 KAIST) 교수를 겸직으로 맡아 서울과 미국을 왔다갔다 할 때였다. 어느날 젊잖은 목소리의 한 신사가 연구실로 전화를 걸어왔다.
"조 교수님, 저를 기억하겠습니까. 연수생 선발 시험장에서 감독을 했던 사람입니다.” 신문과 방송에 내 이야기가 보도되자 그것을 보고 전화를 했던 것이다. 정말 반가웠고 그 당시 고마움이 새삼 떠올랐다. 사람의 인연이란 것은 쉽게 이어지지도, 끊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느낀 날이기도 했다.
조장희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장>가천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