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보다 앞서야할 「의식개혁」/“인치­법치” 논쟁을 보며…(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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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좋은 법도 안지키면 “무용”/「운영의 묘」 제대로 살려야
최근 김영삼대통령의 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국정개혁과 관련하여 적지않은 논쟁이 일고 있다. 특히 우리사회 전반에 걸친 일대 개혁의 필요성과 당위성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으나 개혁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과 혼란이 있는 것 같다.
「인치」 「민치」 등과 같은 모호한 표현이 나오기도 하고 「혁명적」 개혁이라는 말도 번번히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언론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최근의 개혁논쟁을 「인치」 대 「법치」,또는 「민치」 대 「법치」 식으로 성격지우는 것은 문제를 제대로 짚었다고 볼수 없다.
최근의 개혁논쟁과 관련하여 보다 깊은 생각을 요구하는 부분은 법과 제도의 정비,의식개혁의 문제다.
물론 법·제도의 정비와 의식개혁은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며,진정한 개혁이 이 두가지 상호 보완적으로 진행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사회의 절대 다수의 구성원이 바라고 있는 개혁의 성공과 정착을 위해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절실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법의 역할에 대한 관심을 가져 온 사람들에게 가장 흥미있는 문제는 법과 현실의 관리다. 물론 어느 사회에서나 법과 현실간에는 어느 정도의 괴리가 없을 수 없지만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법이 아직도 효과적인 사회제도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즉,법이 「살아있는 법」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법제도만을 놓고 본다면 우리의 법제도는 여타 서구국가들과 별 차이가 없는 발달된 제도다. 그러나 법제도가 발달되었다는 것과 그러한 제도가 그 사회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기능하고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 서구의 근대적인 법제도를 도입한지 이미 상당한 기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제도가 살아있는 제도로서 효과적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대해 한국 사회와 법의 연구에 많은 기여를 한 고 함병춘교수는 한 사회에서 법제도가 효과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세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우선 법규범 자체가 사회의 제반 문제들을 적절히 다룰 수 있도록 충분히 발달해야 한다. 둘째,이러한 법이 제대로 적용·집행될 수 있는 제도 내지 메커니즘이 갖추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법과 제도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과 태도다. 즉 사회 구성원들이 그 사회의 법과 제도를 얼마나 존중·준수하고,또 적극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느냐다.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이 모두 갖추어져 법·제도·의식간에 조화로운 상호작용이 이루어질때에야 비로서 법 절차는 그 사회의 효과적인 절차로 자리잡을 수 있는 것이다.
모양새에 있어서는 서구선진 민주국가들과 별 차이없는 법제도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서구에서와 같이 진정한 의미에서 법이 존중되고 법이 지배하는 사회를 아직 이루어내지 못한 것은 국민의 법 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특히 우리사회에 뿌리깊게 내재하는 유교적 전통인 온정주의,정실·연고주의,집단주의 등은 보편적·합리적 가치 규범으로서의 법을 경시해왔고 효과적인 법제도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어 왔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법제도가 살아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국민들의 법에 대한 의식의 제고와 의식 개혁이다.
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을 뒷받침하기 위해 법과 제도를 정비하는 노력이 중요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정경유착이나 우리사회의 구조적인 부조리·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법·제도가 미비되어 있다면 의당 이를 갖추고 강화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법과 제도를 갖춘다고 해서 사회가 저절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사회의 문제핵심은 법과 제도의 미비가 아니라 있는 법과 제도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운용되지 못하는데 있으며,그 이유는 궁극적으로 사회전반에 걸친 규범의식의 결여와 가치관의 혼란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가장 적절히 요구되는 것은 우리의 의식과 관행 가운데 내재해 있는 여러가지 병리적 요인들을 찾아내 제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최근 경실련·흥사단 등 민간단체가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시민운동 협의회」를 결성하고 의식개혁 운동을 벌이기로 한 개혁의 정착은 법·제도·의식의 상호보관적 뒷받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은 그 중에서도 의식개혁이 아닌가 한다.
국민의 기본권과 3권분립을 천명한 헌법을 채택했다고 해서 민주와 법치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듯 법과 제도를 통한 개혁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깨어있는 국민」이 넘쳐나야 할 것이다.<백진현 외교안보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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