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뇌 속을 손금 보듯 … 11. 돈 벼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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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연구에 몰두하느라 바싹 야위었던 1970년대의 필자.

 1974년 초로 기억한다. 미국 시카고에 있는 의료기기 제조 회사인 ‘뉴클리어 시카고’에서 컴퓨터단층촬영(CT)을 만들고 싶다며 내게 자문을 구했다.

 1년 동안 회사에서 가끔 CT 관련 강의나 자문을 요청하면 나와 달라는 것이었다.

 CT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릴 만큼 불티나게 팔리고 있을 때였다. 의료기 사업에 관심 있는 기업이라면 한 번쯤 CT를 만들어 보고 싶어 했다. 뉴클리어 시카고도 당시 의료기기의 일종인 감마선을 측정하는 카메라를 제조하던 큰 회사였다.

 나는 뉴클리어 시카고에서 제시한 조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문료가 10만 달러였다. 내가 미국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 부교수로서 받던 연봉 1만8000달러의 다섯 배가 넘었다. 나의 소속 학과장인 휴스 교수도 연간 10만 달러의 자문료를 주는 조건으로 초청했다

 CT 의 물리적인 면도 중요했지만, 기업들이 가장 알고 싶어 한 건 내가 푼 CT의 수학적 해법이었다. 단짝이 된 휴스와 나는 로스앤젤레스와 시카고를 오갔다. 휴스는 CT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아이디어를 짜내고 일을 만드는 재주가 뛰어났다. 이 때문에 나와 휴스는 같이 다녔다. 내 역할은 CT 관련 전문지식 제공이었고, 휴스의 주된 임무는 주변 관리였다.

 내가 CT의 비밀을 푼 뒤 많은 기업에서 기술적 자문을 요청해왔다. 이스라엘의 엘신트, 영국에서 처음 CT를 만들었던 EMI도 내가 자문을 했다. EMI는 유명한 음반회사였다. 클래식음악· 팝송 등 다양한 장르의 음반을 만들어 세계 시장에 내놓고 있었다. 그런 회사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CT를 만든 것이었다.

 EMI조차 내게 자문을 구한 것은 미국에서 하루가 멀다고 새로운 수학·물리 원리를 응용한 CT가 잇따라 나왔기 때문이었다. EMI로서는 신제품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였다. 미국 시장이 크다는 것을 안 EMI는 이미 시카고에 CT 개발 및 판매를 위한 현지 법인을 두고 있었다. 내가 자문한 곳은 시카고 법인이었다. 수만 달러를 받고 1년간 기술적 자문을 했다. 엘신트사 역시 수만 달러의 자문료를 내게 준 것 같다. CT에 대한 관심은 높고, 전문가는 거의 없던 때라 내 ‘몸값’은 상한가였다.

 그 시절에도 미국 기업은 지적 재산에 대한 값을 제대로 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한 번의 술 대접 비용으로 자문료를 대신하는 게 비일비재했다. 아마 한국의 어느 회사에 1년 동안 서너 번 자문해주고 1인당 10만 달러를 달라고 했다면 사장이 기절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번 돈으로 75년 12만5000달러를 주고 비버리힐즈 근처 퍼시픽 팰리 사이드에 있는 큰 2층 집을 샀다. 자동차도 중상급인 ‘뷰익’을 탔다. 주립대 부교수로서는 과분한 생활이었다. 그때 나와 같은 급의 교수들이 대부분 4만~5만 달러짜리 집에서 살았다. 내가 산 주택은 몇 년 뒤 25만 달러로 값이 올랐다. 학문의 길로 들어선 뒤 돈을 벌려고 쫓아다녀본 적이 없는 내게 CT의 해법은 ‘돈 벼락’을 안겨준 셈이었다.

조장희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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