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week& cover story] 국제 바람둥이는 에이즈 네트워크의 허브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4면

세상이 좁다는 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식이다. 그러나 얼마나 좁은가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었다. 1960년대에 미국에서 행해진 '좁은 세상'에 대한 실험은 세상이 얼마나 좁은지를 과학적으로 처음 밝힌 것이다. 이 실험이 행해진 후 40년 동안 다른 나라에서 반복된 적이 없다. 이제 한국에서 실험해본 결과 한국인은 미국인의 약 1.4배 되는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너 다리 건너면 한국인 누구나가 서로 연결된다는 것은 간단한 계산만 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가령 한 사람이 1백명을 알고 있다면 한 다리만 거치면 1만명(1002), 또 한 다리 건너면 1백만명, 그리고 또 한 다리를 건너면 1억명이 연결된다. 아는 사람이 서로 중첩되기 때문에 실은 이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그러나 '다리'를 건널 때마다 연결되는 사람의 수가 지수함수적으로 증가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알고 지내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독자들도 잠시 자신의 전화수첩에 몇 명의 이름이 있는지 참고해서 지인의 숫자를 추측하기 바란다.

솔라 풀(Sola Pool)이라는 사회학자는 1백일 동안 평범한 한 사람의 일상생활을 추적하여 그 사람이 중요하게 만나는 사람들의 숫자를 세었다. 시간이 갈수록 새로운 사람이 등장하는 횟수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마지막 날까지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그는 통계적 추론을 통해 이 사람이 평생 만나는 사람이 3천5백명이라고 결론지었다.

지인(知人) 수를 알아내는 또 다른 방법은 전화번호부를 이용하는 것이다. 명부에서 무작위로 3백여명을 추출해 아는 사람에 동그라미를 치라고 한 뒤, 이로부터 아는 사람의 숫자를 통계적으로 추론하는 것이다. 그 결과 한 사람이 평균 5천5백20명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알고 있는 이유는 물론 가수나 영화배우 같은 연예인이나 저명인사들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즉 나는 그를 알아도, 그는 나를 모르는 비대칭적 관계가 포함된 것이다. 한 사람이 알고 지내는 사람을 평균 3백명 정도라고, 최소한으로 잡더라도 몇 다리 건너 연결되는 사람 숫자는 가위 천문학적이다. 사스나 에이즈 같은 질병이 단기간에 전 세계로 퍼지는 이유도 인간 네트워크가 좁기 때문이다.

섹스의 네트워크도 좁은 세상을 이룬다. 카사노바와 같은 바람둥이나 매매춘 여성들이 수많은 섹스 연결선을 가진 허브가 된다. 마치 이착륙하는 항공기가 많아서 뉴욕공항이라는 허브가 전 세계 도시를 잇는 중심 역할을 하듯이 섹스 네트워크의 허브는 에이즈와 같은 질병을 전 세계에 빠른 속도로 전파한다. 동남아 국가 등에서 섹스 산업을 즐기는 사람들은 에이즈 바이러스를 멀리 전달하는 구실을 한다.

좁은 세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가령 한 영화에 공동 출연한 배우가 서로 연결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자. 안성기와 박중훈이 어느 영화에 함께 출연했고, 박중훈과 이경영이 다른 영화에 공동 출연했다면, 안성기와 박중훈은 직접 연결되고 안성기와 이경영은 한 다리 건너 연결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 영화배우들은 공동출연의 네트워크에 의해 연결된다. 카이스트 물리학부의 정하웅 교수는 2002년 말 한국영화 6천4백2편에 등장한 7천9백6명의 배우를 분석한 결과, 모든 배우가 평균 한 다리를 건너면 서로 연결되는, 엄청나게 좁은 세상임을 발견했다.

학문의 세계도 매우 좁은 연결망으로 구성되어 있다. 에르되스라는 수학자는 다른 학자의 문제를 풀어주면서 살아가는 주거부정의 천재였다. 그는 평생 1천여편의 논문을 다른 학자들과 공저했는데, 그의 공로로 모든 수학자가 평균 4.6단계만에 연결되었다.

좁은 세상은 인간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체가 세포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몸속의 여러 생화학 반응에 '함께 참여하는 분자'들 사이의 연결을 네트워크로 파악하면 거의 모든 생명체의 분자들 사이의 평균 연결단계가 3으로 일정하다고 한다.

이렇듯 인간들 사이의 관계망뿐만 아니라 주가변동의 상호 연결망, 인터넷, 항공노선망, 발전소와 변전소를 연결하는 송전 네트워크, 먹이사슬의 네트워크, 유전자 네트워크 등 생명현상과 자연현상 그리고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네트워크가 '좁은 세상'이란 점이 밝혀졌다. 성격이 전혀 다른 네트워크가 거의 동일한 형태의 수학 공식으로 묘사된다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네트워크가 예측하기 힘든 '새로운 현상을 뜨게 하는' 원천이라니 더욱 신기한 일 아닌가? 아직도 덤덤한 독자를 위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인간과 원숭이의 유전자정보가 99% 정도 일치하지만, 유전학에서는 두 종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유전자정보 자체가 아니라 유전자 네트워크라고 한다 (원숭이 같은 인간이 있다는 점은 논외로 한다). 이 유전자 사이의 네트워크가 생명체 고유의 특징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암말과 수탕나귀 사이에서 태어난 노새와 수말과 암탕나귀 사이에서 태어난 버새의 염기서열 유전자는 거의 같다. 그러나 노새와 버새의 차이는 말과 당나귀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왜 동일한 유전자에서 이처럼 다른 형질이 나타나는가? 바로 유전자 네트워크의 차이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 물속에서 방향을 바꾸며 빠르게 움직이는 물고기 떼와 공중을 나는 벌 떼, 혹은 멥새 떼의 움직임을 상상해 보라. 공통점이 있지 않은가. '자신을 둘러싼 공간에 두세 마리가 연달아 있으면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라' 등과 같은 간단한 이동 원칙에 의해서 이러한 공통점이 생겨난다. 즉 개체 사이의 네트워크에 의해 새로운 현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사회현상도 인간이나 조직 네트워크에 의해서 생겨난다. 미국에서 백인들만 사는 마을에 흑인이 이사오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에 갑자기 흑인들만 모여 살게 되는 인종분리 현상이 생겨난다. 왜 그런가? 만일 백인이 자신의 집 건너편이나 뒷집 혹은 옆집에 흑인이 두명 이상 살게 되면 다른 곳으로 이사가기로 결정했다고 가정해 보자. 많은 흑인이 이주해 와도 변화가 없던 마을이 단 한명의 새로운 이주자가 파생시키는 연쇄작용에 의해서 순식간에 흑인마을로 변할 수 있다.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한 행위자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행위자 사이의 네트워크에 의해서 '뜨는 현상'이다.

생명현상과 자연현상, 그리고 사회현상에서 네트워크에 대한 관심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러나 네트워크의 과학은 광고에서 '입 소문'의 힘과 전염병의 확산, 그리고 특정한 질병을 통제하기 위한 유전자 공학 등에서 기존 학문과는 전혀 다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네트워크'연구를 통해 인간의 지식이 아직 미치지 못한 복잡한 계로서의 자연세계와 사회현상을 이해하는데 새로운 지평을 열어 가고 있는 것이다.

김용학 연세대 교수(사회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