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 깊어지는 3국 '마땅한 수단 없어… '노 정권 외교 시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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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경찰이 26일 한국인 인질들이 납치된 곳으로 알려진 가즈니주 고속도로의 한 검문소에서 차량과 승객을 조사하고 있다. [가즈니 AFP=연합뉴스]

한국은 …
열쇠 쥔 미, 아프간에 샌드위치 신세
탈레반 강온파 나뉘어 협상 어려워

탈레반 무장단체가 한국인 인질 1명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접한 뒤 노무현 대통령이 맨 먼저 한 일은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였다. 26일 새벽 0시5분이었다.

뒤이어 오전 5시부터 두 시간 동안 청와대에서 열린 안보정책조정회의는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을 대통령 특사로 아프간 정부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백 실장은 오전 11시30분 인천공항을 출발했다.

이미 조중표 외교부 1차관이 현지에서 대책반을 이끌고 있는 상황에서 청와대 안보실장을 추가 파견했다는 건 그만큼 정부의 상황 인식이 심각하다는 얘기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상황이 엄중하다"며 "특사 파견은 노 대통령의 뜻"이라고 말했다.

그런 만큼 정부의 고민은 크다.

현실적으로 한국 정부가 22명 인질의 석방 여부를 놓고 협상을 벌여야 할 상대는 탈레반 무장단체다. 하지만 이 상대가 하나로 통일돼 있지 않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상대방이 몇 개 그룹으로 분산돼 있고 피랍 한국인도 분산 억류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며 "요구 조건도 유동적이고 통일돼 있지 않다고 한다"고 토로했다. 자연히 협상의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장 큰 고민은 강경파 무장단체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어도 그 수단이 정부 손에 없다는 점이다. 협상을 하는데 상대방이 자꾸 내 손에 없는 걸 내놓으라고 하는 셈이다.

탈레반 수감자의 석방은 직접적으론 아프간 정부의 권한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론 미국 정부가 움직여야 가능한 일이다.

현재의 하미르 카르자이 정권을 세우고, 아프간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주도하는 건 미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납치 단체와 협상하지 않는다'는 국제원칙을 앞세워 온 미국으로서도 한국 정부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거들 수 없는 처지다. 탈레반과 아프간 정부, 미국 정부 사이에서 한국 정부가 샌드위치가 된 격이다.

정부가 26일 백 실장을 대통령 특사로 보낸 건 포로 석방 문제와 관련해 아프간 정부를 직접 설득해 보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한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아프간 정부와 외교 관계가 깊지 않아 대화에 어려움이 많다"며 "백 실장의 역할은 카르자이 대통령을 포함해 아프간 정부에 노 대통령의 뜻을 직접 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도 한국 정부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 노력이 성과를 거둘지는 불투명하다. 지금까지 아프간 정부의 입장은 확고하다. 23일 압둘 하디 칼리드 내무차관은 알자지라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아프간의 법과 이익에 반하는 탈레반의 인질-수감자 교환 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

노무현 정부의 외교력은 임기 말에 혹독한 시험을 치르고 있다.

박승희 기자

미국은 …
원칙과 동맹 사이서 딜레마
한국 내 반미감정 자극 의식

인질 1명 살해로 장기화 조짐이 짙어지고 있는 탈레반 무장세력의 한국인 납치 사태는 상당 부분 미국이 열쇠를 쥐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상대로 테러와의 전쟁을 주도하는 게 미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사건 발생 1주일이 넘도록 말과 행동을 극도로 아끼고 있다. 섣불리 나설 경우 되레 인질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미국은 드러나게 한국을 적극 도울 경우 미국을 주적으로 삼고 있는 탈레반을 자극해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다. 한국 정부의 인식도 마찬가지다.

그 때문에 미 국무부는 "인질 석방을 위한 한국의 노력을 지지하며, 인질들은 즉각 무사히 석방돼야 한다"는 절제된 코멘트만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한국을 돕고 있다"는 말조차 피하고 있다.

미국의 조심스러운 대응에는 보다 근본적인 배경이 있다. '납치범들과는 결코 협상하지 않는다'는 대테러전의 기본원칙을 동맹국 지원과 어떻게 조화시킬지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잡고 있는 탈레반 수감자와 한국인 인질을 맞교환하려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설득하거나 최소한 묵인해야 한다. 탈레반에 돈을 주고 인질들을 구하는 방안도 마찬가지다. 한국 정부는 내심 미국의 도움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미국으로선 선뜻 응하기 어려운 입장이다. 아프간 정부에 탈레반 수감자들을 풀어 주라고 압박할 경우 맛을 들인 탈레반의 외국인 납치가 줄을 이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돈을 주고 인질들을 데려오는 방안도 미국이 그동안 표방해 온 원칙과 정면 배치된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놓고 수수방관하는 것처럼 비치면 자칫 미국 책임론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데 미 행정부의 고민이 있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를 앞둔 민감한 시점에 자칫 반미 정서가 또다시 촉발될까 봐 우려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은 공식 대응을 최대한 자제하는 대신 한국과의 '조용한 공조'에 진력하고 있다. 미 국무부와 국방부.정보기관 관계자들은 한국 정부의 파트너들과 거의 매시간 접촉하면서 정보 제공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서도 "사태 해결 주체는 어디까지나 한국이며 미국의 역할은 지원에 국한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인질 억류가 장기화하면 맞교환이나 그에 상당하는 반대 급부 제공 외에는 인질 석방 방안을 찾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미국은 대테러 전쟁 원칙과 동맹국 지원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워싱턴=강찬호 특파원

아프간은 …
'포로 맞교환' 미국 눈치보기
미 경고 두렵고 한국 압박도 부담

탈레반에 납치된 한국인 인질 석방 협상에서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눈치를 살피고 있다. 탈레반은 인질과 탈레반 동료 수감자를 맞교환하자고 계속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탈레반 동료 수감자를 풀어줄 수 있는 결정은 아프간 정부의 고유 권한이다. 맞교환에 대해 아프간 정부는 이미 불가 입장을 밝혔다.

압둘 하디 칼리드 차관은 23일 "아프간의 법과 이익에 반하는 인질-동료 수감자 교환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이런 입장 고수는 미국을 의식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아랍 위성채널 알자지라는 25일 "아프간 정부가 인질-수감자 맞교환을 완강히 거부하는 것은 3월 이탈리아 기자 석방 때 탈레반 동료 수감자를 풀어줬다가 미국 정부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당시 미 국무부 숀 매코믹 대변인은 "테러리스트와 협상해 미국과 동맹국의 입지를 흔들었다"고 비판한 뒤 "앞으로는 이런 양보를 하지 말 것을 기대하겠다"고 경고한 바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800달러에 불과한 아프간은 예산의 90% 이상을 해외원조에 의존하고 있다. 그중에서 미국은 2001년 아프간 전쟁을 통해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킨 뒤 모두 140억 달러(약 13조원)가 넘는 돈을 이 나라에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프간 전쟁 이후 탄생한 지금의 하미드 카르자이 정권도 당연히 친미 정권이다. 미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프간 정부는 또한 인질구출이 급선무인 한국 정부의 압박도 무시하기 어렵다.

노무현 대통령은 배형규 목사가 피살되자 26일 특사까지 파견하면서 아프간 정부에 사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 줄 것을 촉구했다. 인명 피해가 더 날 경우 카르자이 정부는 "현지 주민을 도우러 간 외국인들의 생명을 저버렸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원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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