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아프고 끔찍한 상황 빨리 빠져나오게 구해 주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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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무장세력에 의해 살해된 배형규 목사의 시신이 담요에 싸인 채 아프가니스탄 경찰차에 실려 25일 가즈니주 미군 기지로 옮겨지고 있다. 그의 유해는 수도 카불을 거쳐 곧 귀국길에 오를 예정이다. 탈레반은 배 목사를 총으로 살해한 뒤 시신을 가즈니주 카라바그 지역의 고속도로변에 버렸다. [가즈니 AP=연합뉴스]

"우리는 지금 모두 건강상태가 매우 좋지 않으며 아픈 사람도 꽤 있습니다. 제발 빨리 좀 구해 주세요. "

탈레반 무장단체에 배형규 목사가 피살된 뒤 남은 22명의 인질 중 임현주(32)씨가 26일 오후 미국 CBS방송과의 독점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CBS는 이 인터뷰가 탈레반 지휘관의 주선으로 이뤄졌다고 밝혔다. 현지 안내를 맡은 임씨는 아프가니스탄에서 3년간 살았으며, 현지어인 파시어를 꽤 잘한다고 지인들은 전했다.

파시어와 한국어를 섞어 3분여 동안 이뤄진 전화 녹취에서 임씨는 "현재 인질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다. 나는 17명의 다른 여성과 함께 억류돼 있다. 남자들은 다른 곳에 감금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매우 지친 목소리로 "우리는 지금 끔찍한 환경에 처해 있다. 하루하루 견디기 힘든 극한 상황"이라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는 "남녀가 격리돼 있기 때문에 배 목사님이 희생됐는지는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CBS 기자가 배 목사의 피살 소식을 전하자 이렇게 답변한 것이다.

그는 "하루 속히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 제발 부탁한다"고 흐느끼며 통화를 마쳤다.

아프가니스탄 현지 통신인 '파자왁 아프간'도 임씨와 통화했다고 이날 보도했다. 이 통신에 따르면 임씨는 "인질 일부는 건강이 매우 나빠져 의약품이 절실하다"며 탈레반이 요구하는 대로 한국인 인질을 탈레반 수감자와 맞교환해줄 것을 요청했다. 육성 녹음은 한국말로 "빨리 구해 달라"는 흐느낌으로 끝났다고 통신은 전했다.

◆탈레반 왜 인터뷰 허용했나=한국과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으로 보인다. 탈레반이 석방 대가로 요구한 동료 수감자 석방을 아프간 정부가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를 통해 압박을 가하려는 노림수로 보인다. 석방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는 인질의 절박한 목소리는 한국에서 반드시 그들을 구출해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25일 배형규 목사가 살해된 직후 제기된 인질들의 안전 여부에 대한 의혹을 잠재우기 위한 의도도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탈레반은 외국인 납치에서 동료 수감자 석방과 몸값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노리고 있다.

하지만 한국 정부 측이 인질의 생존과 안전 여부에 의심을 품어 석방 협상에 장애가 생긴다면 탈레반으로서도 이로울 것이 없다. 여기에 인질 살해로 인해 들끓는 국제 여론을 여성 인질 쪽으로 돌리는 효과를 노렸을 수도 있다.

3월 이탈리아의 다니엘레 마스트로자코모 기자가 납치됐을 때도 탈레반은 초췌한 모습으로 석방을 도와 달라고 호소하는 그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를 공개했다. 이탈리아 정부가 그가 살아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라고 탈레반에 요구한 직후였다. 비디오 테이프가 공개된 뒤 이탈리아에서는 마스트로 자코모 기자를 석방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홍주희 기자

◆ 임현주(32)씨=대구 출신으로 1999년 대구과학대 간호학과를 졸업했다.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 3년 전 "병원이란 곳을 알지도 못하는 이들을 돕겠다"며 아프가니스탄으로 의료봉사활동을 떠났다. 'afghanlove'라는 e-메일 주소를 쓸 정도로 아프간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올 6월에는 양팔을 잃어버린 아프간 소녀를 한국으로 데려와 의수를 달아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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