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올림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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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26면

1932년 LA 올림픽에 중국 대표로 유일하게 출전한 류창춘. 김명호 제공

1919년 5·4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은 민주(民主)와 과학(科學)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모든 분야에 확산시켰다. 체육도 예외일 수 없었다. 부동자세, 구보, 총검술 등 군대식 체조들이 조금씩 멀어지고 육상이나 구기 종목 등이 생활 속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24년 국민체육의 확산에 주력했던 왕정팅(王正廷, 1882∼1961)에 의해 사회체육조직인 중화전국체육협진회(中華全國體育協進會)가 탄생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9]

왕정팅은 중국 최초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었다. 이때부터 외국인에 의해 주도되던 전국운동회가 중국인에 의해 조직되기 시작했다. 그간 전국운동회의 심판과 코치는 모두 외국인이었다. 중화전국체육협진회는 얼마 후 IOC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31년 9·18사변을 일으켜 둥베이(東北, 만주)를 장악한 일본은 32년 LA 올림픽에 동북의 선수를 일본 대표로 참가시켜 동북이 일본의 영토임을 국제사회에 선전하고자 했다. 둥베이 대학 체육과 학생 류창춘(劉長春)에게 눈독을 들였다. 다롄(大連) 출신으로 단거리 선수였던 류창춘은 100m 10.07초라는 중국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가 32년에 세운 기록은 23년간 깨지지 않았다. 둥베이대학을 중국 체육의 요람으로 만드는 게 꿈이었던 설립자 장쉐량(張學良)은 32년 7월 1일 류창춘을 중국 대표로 올림픽에 출전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장쉐량이 경비를 지원했다. 대표단 6명 중 선수는 류창춘 혼자였다. 7월 8일 상하이(上海)에서 배를 타고 개막식 이틀 전 LA에 도착했다.

LA 올림픽은 2000여 명의 선수가 선수촌에 머문 최초의 올림픽이었다. 류는 여독이 풀리지 않았다. 400m는 포기하고 100m와 200m에 출전했다. 첫 경기에서 4위와 5위를 하는 바람에 탈락했지만, 류는 중국 최초의 유일한 올림픽 선수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중국인을 대표로 출전시키려던 일본의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류는 4년 후 베를린 올림픽에도 중국 대표로 출전했다.

베이징(北京) 올림픽을 1년 앞두고 중국에서는 류창춘의 일대기를 영화로 제작 중이다. ‘한 사람의 올림픽(一個人的奧林匹克)’이라는 쓸쓸하지만 비장감 넘치는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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