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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땅 잃어 가는 아나운서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방송의 얼굴이 돼온 아나운서직이 점차 사양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카메라·마이크 앞에서 프로그램의 최종 전달자 역할을 해온 아나운서의 위상이 전문화·개성화·다양화 추세에 밀려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라디오 방송만이 있던 시대 음악·드라마를 제외한 거의 모든 프로그램에 걸쳐 진행을 맡아오던 아나운서는 TV 등장 및 프로그램의 눈부신 변화와 함께 전천후 출연자로서의 역할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방송 진행자의 전문화 추세를 타고 뉴스는 기자(앵커맨·뉴스 캐스터), 오락프로는 연예인·전문MC, 토크쇼는 개성을 가진 인사(퍼스낼리티·호스트)들이 이미 완전히 자리잡았고 교양·정보프로그램의 내레이터·리포터도 각 분야의 전문가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국내 TV의 경우 최우철·박영선·백지연씨 등은 아나운서에서 기자 (앵커)로 직종을 전환했고 김기덕씨는 전문 음악DJ로 변신했는가 하면 황인용·원종배·이계진씨등은 퍼스낼리티 진행자로 성가를 높이고 있다. 방송위원회가 최근 실시한 TV 진행자 현황조사에 따르면 4개 TV채널의 개 오락프로 가운데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것은 10개 (전체의 13·7%)에 지나지 않고 연예인·전문MC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에 따르면 퀴즈·생활정보· 교양프로그램에서도 연예인은 물론 대학교수·시사평론가·바둑기사·요리 연구가등 전문가의 비중이 점차 커지고 있다.
제작진도 사내에서 업무 협조를 받아야 하는 아나운서를 캐스팅 하는 것보다 개성을 갖추고 일반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연예인이나 전문가를 기용하는 것을 더욱 선호하고있다.
KBS의 한 TV PD는 사내에서 봉급을 받는 아나운서를 프로그램에 참여시킬 경우 제작비를 아낄 수 있으나 개런티 제약을 하는 프리랜서 진행자가 보다 적극적이고 활기를 띠는 일이 많고 일반적으로 시청률도 높은 편』이라고 설명한다.
프리랜서로 전환한 뒤 가장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황인용씨의 경우 한 프로그램만 맡아도 출연료가 방송사 직원인 아나운서 봉급의 몇 배에 이르고 있는 실정이다.
MBC가 최근 기구 개편에서 아나운서 실을 편성이사 산하의 한 부서로 내려앉힌 것은 우리 방송에서도 아나운서의 영역 및 위상 축소 추세가 가시화되고 있음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아나운서의 영역축소 조치가 아나운서 출신인 차인태씨가 편성이사로 승진되면서 이뤄진 것이어서 더욱 의미심장한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MBC 아나운서들은 성명을 통해 회사측의 졸속개편에 강력히 항의했으나 그러면서도 아나운서의 위상이 축소되는 방송 환경에서 변화를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방송환경에 대한 깊이 있는 검토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차인태 이사는『아나운서 출신 편성이사가 재직하는 한 사원·노조원으로서의 아나운서들이 불이익을 받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아나운서들이 급변하는 방송환경에 대처하고 활로를 마련해나가는 방법을 다각적으로 연구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제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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