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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살해 통첩] 살해 위협 뭘 노렸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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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탈레반은 미군을 포함한 나토군의 거듭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최근 아프가니스탄 남부와 동부에서 과거의 세력을 회복했다. 견착식 로켓포와 AK-47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탈레반 병사들이 파키스탄과의 국경인 토르크함 초소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중앙포토]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무장세력 탈레반이 현지 봉사에 나섰던 한국인 21명(한국 정부 확인)을 납치한 목적이 드러났다. 현지에 파병한 동의.다산부대 등 한국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자신들이 납치했다고 주장하는 탈레반 무장단체 대변인은 아프간 주둔 한국군에 대해 21일 낮 12시(현지시간)까지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한국인 18명(납치단체 주장)을 살해할 것이라고 경고한 것으로 외신은 전했다. 무장단체들은 현재 독일인 2명도 구금하고 있으며, 아프간 주둔 독일 군대가 철수하지 않을 경우 이들도 살해하겠다고 주장했다.

납치범들의 목적은 당초 수감 동료의 석방이 아니냐는 관측을 낳았다. 과거에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납치한 외국인을 풀어주면서 잡혀간 동료를 구출하는 식이다. 일부에서는 금전을 목적으로 납치했다는 관측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은 정치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탈레반 세력은 최근 외국인 납치에 부쩍 열을 올리고 있다. 한국인 납치 사건 하루 전인 18일에도 독일인 2명과 아프가니스탄인 6명이 납치됐다. 외국인 납치는 올 들어 거의 매달 발생하고 있다. 탈레반을 비롯한 아프간 무장세력이 이라크 저항세력처럼 외국인을 무차별로 납치하는 것은 인질을 새로운 '무기'로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외국 군대의 진주로 자신들의 종교.정치적 이념을 펴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파병국 국민을 납치해 철군을 압박하는 것이다.

탈레반이 외국인 납치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올 3월 벌어진 이탈리아 일간지의 아프가니스탄 특파원 다니엘 마스트로자코모 기자 납치 사건에서 상당한 정치적 성과를 얻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탈레반은 이탈리아 기자를 납치한 뒤 이탈리아군 철수를 석방 조건으로 요구했지만 뒤로는 수감 동료를 석방하면 풀어주겠다며 협상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사건 직후 이탈리아 야당이 '파병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니냐'고 정부를 추궁하자 1950명의 현지 주둔 이탈리아군이 철군할 것을 우려한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이 탈레반 재소자 5명을 풀어준 것이다. 결과적으로 납치라는 무기가 탈레반에 동료 석방이라는 예상 밖의 정치적 승리를 안겨준 것이다. 협상 과정에서 미국과 영국은 이런 사태를 예측하고 "이 사건의 잘못된 처리가 탈레반의 외국인 납치를 부채질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나 이들이 하루 이틀 새 한국인을 쉽게 해치지는 못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자신들의 목적이 한국군 철수인데, 철군이라는 결정이 그렇게 빨리 나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장단체들은 시간을 끌면서 철군 계획이라도 내놓을 것을 압박할 가능성이 있다. 이들이 먼저 납치한 독일인 2명을 살해할 경우 한국인도 해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에서 이들이 독일인 인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정보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군 관계자는 20일 말했다.

아프간에선 최근 들어 탈레반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18일 탈레반이 최근 그들의 거점인 아프간 남부 지방에서 북쪽과 서쪽, 그리고 수도 카불로 점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라 미군 1만여 명과 나토군 3만7000명이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고 있다. 이에 따라 탈레반은 공세에서 벗어나고자 부쩍 외국인 납치에 열중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탈레반은 2001년 권좌에서 축출된 뒤 지난해 가장 강력한 공세를 펼쳤다. 이에 나토군을 이끌고 있는 영국이 회원국에 병력 증강을 요청했으나 선뜻 나서는 나라가 없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나토군이 무장세력 소탕작전을 대규모로 벌이는 과정에서 민간인 피해가 잇따르면서 아프간 국민의 친 탈레반화가 가속하고 있다. 피랍자 수색과 석방 협상에서 현지 주민의 도움을 받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박경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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