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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과 JP의 어색한 「만남」/이상일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3일 오전 열린 민자당 광명시 지구당 개편대회에서는 기묘한 운명의 만남이 있었다. 이날 만남의 주역은 김종필대표와 이곳 지구당위원장으로 뽑힌 손학규 서강대교수.
두사람이 이제까지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기에 이날 당원결연식을 보면서 기자는 인간운명의 수레바퀴는 참으로 얄궂다는 느낌을 가졌다.
잘 알다시피 김 대표는 5·16군사쿠데타 주역으로 「유신본당」을 자처했던 인물. 그는 현재 개혁강풍이 부는 와중에서도 가끔 보수역풍을 일으켜 개혁바람의 속도조절을 꾀하는 장본인이다.
반면 손교수는 김 대표의 정치노선에 늘 항거했던 인물이다. 그는 김 대표가 우리나라 대표로서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을 진행시킬때 「굴욕외교 반대」시위의 끄트머리에 따라나선 것을 시발로 계속 반체제의 길을 달려왔다. 그는 67년 6·8부정선거규탄시위,69년 삼선개헌반대운동의 주동자중 한명이었다. 그는 유신시절에는 공안당국이 「눈엣가시」로 삼았던 도시선교사업에 뛰어들어 감방을 여러차례 들락날락했었다. 그는 얼마전까지도 운동권의 핵심적인 이론가였다.
그런데 두사람이 3일 다정스럽게 악수를 나눴다. 김 대표는 『손 동지』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당원들에게 『손 동지는 우리사회에서 정의로운 토양을 일구는데 노력했다』고 치켜세웠고 『여러분은 손 동지의 정치철학·역사관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손동지」가 이날 밝힌 정치철학·역사관은 김 대표의 아픈 곳을 콕콕 후벼파는 것이었다. 손 위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국민에게서 위임받은 권력을 국민을 위해 사용하지 않던 시대,고압적 관료주의가 시민의 창의를 억압하던 시대,정치권력과 금력이 결탁해 부정부패를 확대 재생산하던 시대는 이제야말로 청산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역대정권이 집권초기에 개혁을 시도했으나 금세 실패한 것은 국민의 지지가 아닌 물리적인 힘에 의존했기 때문』이라며 재야출신답게 비판조였다. 손 위원장이 이같은 발언을 할때 김 대표는 줄곧 굳은 표정이었다.
이어 손 위원장과 절친한 사이인 김덕용 정무1장관의 축사차례. 김 장관은 『손 위원장과는 민주주의가 신음하던 암담한 시대에 늘 대화하고 의논하던 사이였다. 이런 그가 오늘 우리의 동지가 되었으니 이 이상 기쁜 일은 없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이때도 매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이 달라져 득세한 개혁파의 목소리가 어느때보다 컸던 이날 대회에서 김 대표는 운명의 수레바퀴가 얄궂음을 새삼 실감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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