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받을만한 조선조 청백리/「재산공개」계기로 본 역사속의 공직자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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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청렴결백 최대덕목… 선발땐 갖가지 혜택/황희·유성룡 유명… 거적자리·세집 생활
공직자들의 재산공개 파문이 계속되면서 옛 우리 선비들의 공직자 상인 청백리에 대해 다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조선조의 청백리상은 유교의 성리학에서 도출된다는 점에서 지금의 자본주의적 합리주의 시대에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공복이 가져야 할 기본자세로서 본받아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도 일반 백성을 직접 대하는 지방관을 중심으로한 바람직한 공직자 상은 있었으나 이것이 공직윤리로서 확립된 것은 국가체제와 관료제도가 확립된 조선조에 이르러서다.
삼국시대에서 조선조에 이르는 우리 역사상의 공직자상은 부패하지 않았다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적극적 의미가 담긴 맑고 깨끗한 관리를 의미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청백리가 국왕이나 조정이 천거하여 선발하는 일종의 제도로서 확립된 것은 조선조때로 순조때까지 대략 2백18명이 선정됐다.
그에 앞서 고려조에도 성품이 강직하고 청백해 권력에 아부하지 않으며 절개가 굳은 사람으로 백성들을 잘기른 명관을 일컫는 「양리」 명칭이 있었으나 공식적인 선발제도는 아니었고 그 행적이 전해지는 사람도 5명에 그친다.
조선조에 이르러 「청백리」라는 개념과 명칭·제도가 확립됐다.
조선조의 공직윤리는 수기치인의 덕목에서 나타난 ▲청백 ▲근검 ▲후덕 ▲경효 ▲인의 ▲선정 ▲충성 ▲존법 등 여덟가지로 요약되나 그 기본은 청렴에 있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청렴은 목민관의 본무요,모든 선의 근원이요,덕의 바탕이니 청렴하지 않고서는 능히 목민관이 될 수 없다.
욕망이 큰 자일수록 반드시 청렴해야 할 것이니 사람이 청렴하지 못한 까닭은 그 지혜가 짧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부터 깊은 지혜를 가진 선비로서 청렴을 좌우명으로 삼고 탐욕을 경계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고 쓰고 있다.
청백리의 선정기준은 청렴결백 외에도 ▲절약·검소 ▲근면·성실하여 선정을 베풂 ▲준법,즉 잠업번성·인구증가·교육진흥·부역의 균형 등 수령7사를 무난히 수행하는 것의 네가지로 요약된다.
주로 지방관을 지낸 사람을 대상으로 했으며 살아서는 염근리,죽어서는 청백리로 불렸다.
이들에게는 같은 품계 내에서의 승진과 요직등용,국가로부터 약간의 소모품 지급,자손이 과거없이 관리가 되는 음직 기회 등 갖가지 혜택이 주어졌다.
조선조에서 청백리는 임진란이 일어난 선조때까지 전기 2백년간 1백62명이라는 다수가 배출됐으나 후기 3백년간에는 56명에 지나지 않는다.
청백리가 많았던 조선전기가 국운을 떨치고 있음도 주목된다.
대표적 청백리로는 조선 창업기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황희가 꼽힌다.
그는 30년간이나 정승을 지냈지만 언제나 거적자리에서 자는 서민생활을 했다.
하루는 왕이 그의 집에 와서 이를 목격하고 『이 자리는 가려운데 긁기는 안성맞춤이겠다』고 감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큰 아들의 집들이에 갔다가 새로 지은 집의 규모가 너무 큰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돌아와버린 일도 있다.
초청받은 정부관리들도 이를 보고 하나 둘 돌아가버렸고 장남은 지체없이 집을 고쳐 지었다 한다.
영의정까지 지내며 재무와 군사행정에 큰 치적을 보였던 선조때의 서애 유성룡도 유명하다.
그는 관직에 재임할때 항상 셋집에서 살았고 조복이 한벌밖에 없어 등청할때 어려움이 많았으며,고향에 내려갔을 때는 끼니마저 어려웠다고 한다.
퇴계와 함께 대표적인 학자로 꼽히는 율곡 이이도 대표적인 청백리로 꼽힌다.
그는 대사헌,황해도 관찰사,좌찬성을 지냈으나 서울에서 관직을 지낼때 집한칸도 가져본 일이 없었다.
가난한 친척들은 그의 셋집에서 동거하며 죽을 끓여 먹고 살았으나 친구가 쌀과 콩을 선물로 주자 공직자로서 부담이 된다며 사양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는 죽은 뒤에 이웃들이 돈을 염출해 장례를 지냈을 정도로 청빈으로 일관했다.
『청백리 정신과 공직윤리』의 저자인 이서행정신문화연구원교수는 『현대행정은 능률성과 민주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보다 근원적인 요소는 행정의 윤리성에 더 큰 비중이 있다고 본다』고 말하고 『조선조의 청백리 정신으로 꼽히는 8대 덕목은 오늘날 공무원들의 기강확립과 서정쇄신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했다.<조현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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