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닥잡던 러정정 다시 혼미/대통령­의회의장 합의안도 부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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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의회,옐친 발목잡는 결의안 계속 발의할듯/각 공화국 자치요구·새 세력 출현 가능성도
혼란의 탈출구를 찾아가는 듯 보였던 러시아 정국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
27일 밤부터 28일 사이에 벌어진 이같은 상황은 러시아의 헌정위기가 더욱 심화되고 있으며 뚜렷한 탈출구가 없음을 다시한번 드러낸 것이다.
하룻밤 사이 대통령과 국회의장·헌법재판소장 등 러시아의 정계지도자들의 합의사항이 3번씩이나 바뀌고 뒤집히며,결국에는 의회에 의해 거부되는 사태는 러시아의 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모스크바를 비롯한 러시아 전역은 28일 밤 11시까지 지속된 옐친과 하스불라토프에 대한 탄핵·불신임 투표 결과를 지켜보고 그 결과를 놓고 토론하느라 밤을 밝혔고,크렘린궁을 앞뒤로 장악한 채 시위를 벌이던 친옐친,반옐친시위대는 불신임투표 결과가 알려진후 서로의 승리를 외치며 자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옐친대통령은 이날 두번이나 시위대 앞에 나가 『로시야 로시야』를 외치며 의회가 러시아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을 탄핵하려 한다면서 자신은 의회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든 그 결정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러시아민중에게 자신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했다.
이날 옐친대통령이 국민들앞에 직접 나가 시위대를 선동함으로써 러시아의 정치는 지난 91년 8월 쿠데타이후 처음으로 정치지도자들이 정치의 장을 포기하고 거리의 민중에 달려나가는 거리 정치시대로 향하게 됐다.
또 시민들이 서로 대립되는 주장을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옴으로써 러시아의 국론 분열과 권력의 공백상태가 조속히 수습되지 않을 경우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초래될 것임을 예고했다.
옐친대통령은 앞으로 의회의 결정과 무관하게 국민투표 등 자신의 계획을 밀고나갈 것이며,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대통령 포고령을 무기로 사용할 것이 확실하다.
또한 의회는 옐친과 하스불라토프에 대한 불신임 투표 과정에서 보여주었듯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만을 제외하고는 투표를 통해서는 그들이 원하는 어떤 것이든 관철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돼 대통령의 포고령에 대립되는 의회의 결의안을 계속 발동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된다면 결국 러시아는 대통령도,의회도 국정을 컨트롤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들게 되며 지난 90년초부터 러시아와 소연방이 대립했던 것과 유사한 양상의 대립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이럴 경우 러시아 연방내 지방자치공화국과 자치주 등이 연방정부의 명령을 사실상 거부하고 자치의 목소리를 높일 것이 확실하며,국정혼란을 수습하고 러시아의 국익과 국민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부를 앞세운 제3의 세력이 출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28일의 상황은 옐친이나 그 반대파들이 주장하듯 자신들의 승리가 아니라 제도정치권 모두의 패배며,특히 옐친은 탄핵은 모면했으나 많은 상처를 받아 더이상 전국민적인 지도자는 아님이 증명돼 앞으로 정치적으로 상당한 열세에 처할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과 국회의장이 합의해 제출한 난국타개안이 의회에 의해 거부된 것도 그렇고,이에 대한 찬반토론 과정에서 원내의 20개 주요정파 가운데 단 1개 정파만이 찬성한 사실도 옐친대통령의 지도력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또 원내세력이 단순히 보수파와 개혁파로 나뉘어있지 않고 분열상이 훨씬 심각하며 대통령이나 최고회의의장 어느 누구도 이들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스크바의 분석가들은 앞으로 어떤 합의안이 나올 지 알 수 없으나 장기적으로 러시아는 분열과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모스크바=김석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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