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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쟁이들의 분노(유승삼칼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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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박양실 전 보사부장관이 운영하는 산부인과의 연간 매출액에서 이것저것 경비를 제한 총소득액이 89년에 8백98만원,90년 1천1백95만원,91년 1천8만원이었던 것에 월급쟁이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무명 의사가 지방에서 운영하는 산부인과 의원도 아니고 여의사회 부회장을 하는 사람이 서울 한복판에서 하는 큰 산부인과의 한달평균 소득이 고작 대학을 졸업하고 갓 취업한 사람의 월평균 임금과 거의 같다니 속이 끓어오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법적으로 탈법이었던 것도 아니고 세무당국에 의해 버젓이 「성실신고」로까지 인정된 떳떳한 것이었다니 더욱 그렇다.
그러나 실은 이는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 것이다.
○땀흘린 소득에 중과세
남의 일이라 크게 관심을 두어오지 않았을뿐 「세무조사가 어렵다」 「세무인력이 달린다」 「세무전산화가 안돼 있다」 「소득이 들쭉날쭉이다」 등등 갖가지 이유로 그저 본인들의 양심에 의지해 세금을 매겨온지 이미 오래됐다.
그러니 그저 소득을 감출래야 감출 길이 없는 월급쟁이들만 정부의 세정목표를 손쉽게 달성해 주느라 허리가 휜다. 특히 상여금을 받을때는 더 그렇다. 월급쟁이들이야 고정봉급화된 상여금 받는것이 큰 재미인데 상여금을 받고 보면 세금이 많은지 수령액이 많은지 모를 지경이다.
그런데 누가 봐도 월급쟁이와는 비길 수 없는 의사·변호사 등 자유직업 소득자들의 납세액이 알고보니 그 월급쟁이의 반도 안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어디 자유직업소득자뿐인가. 불황을 모르는 음식점이나 술집엘 가봐도 영수증을 제대로 주는 집은 많지 않다. 이들 업소들은 세무당국과 교제만 잘 하면 영세사업자인 부가세과세특례자가 되어 연간 매출액의 2%만 세금을 내면 된다.
음식점·술집이야 탈세하고 절세했다 해도 어느 정도의 노동은 했으니 또 그렇다 치자. 열흘만에 목이 달아나게 한 것도,재산공개를 하라니 사회의 비난을 받을까봐 전전긍긍인 공직자들이 떨고 있는 것도 결국은 과다보유한 부동산때문인데 그 부동산에 대한 과세는 더욱 더 가관이다.
2백만원짜리 중고차에도 1년에 약 20만원의 세금이 붙고 월1백만원 받는 월급쟁이도 연간 수십만원의 세금을 내는 판에 부동산에 대한 평균 실효세율은 0.04%다. 1억원짜리 땅을 가졌다해도 연간 세금이 고작 4만원인 셈이다. 땀흘려 얻은 소득에 대해선 중과세하고 불로소득에 대해선 형식적인 세금을 물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놓고 보면 최근 토지에 대한 과세가 강화되었다고 해서 조세저항이니 뭐니고 하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다. 지난해 종합토지세 부과통계를 보면 10만원이상 낸 사람은 전체 과세대상자의 3.4%에 불과했다.
세율만이 문제가 아니라 과세대상을 잡는데서부터 월급쟁이들은 억울하기 짝이 없다. 세금을 부과할때는 소득에서 필요경비를 공제한 순소득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에 대해선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병원의 소득계산일 경우 인건비뿐 아니라 의료장비구입 등 갖가지 비용을 가족공제 등과 함께 과세대상에서 제외시켜준다.
○필요경비 제외도 차별
그러나 월급쟁이들의 필요경비라 할 공제액은 항목수만 많지 실제비율은 정말 쥐꼬리만큼 밖에 안된다. 이래저래 월급쟁이들은 억울하고 또 억울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월급쟁이들 대부분은 몸뚱이 하나이외에는 별다른 재산없이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있다. 결혼할때 부모가 전세방이라도 마련해주면 행운아라 할 수 있다.
이들이 평생 큰 잘못없이 일했다치면 집칸이라도 장만하고 사회보장제도 제대로 안된 형편에선 노후생활이라도 그럭저럭 꾸려나갈 정도의 저축도 하고 또 자식에게 얼마간의 유산이라도 넘겨줄 수 있어야 정상일 것이다.
그래야 자신은 눈치꾸러기인 월급쟁이였으나마 자식은 다른 길을 걸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경력도 쌓을만큼 쌓아 봉급이 이젠 웬만해졌다 싶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누진세라는 것이 월급을 뭉텅 깎아내버린다.
명분이야 더할나위 없이 좋다.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고 고소득에 고세금이라는 것이다. 떼어놓고 생각하면 말 자체야 옳지만 이렇게 되면 월급쟁이는 평생 월급쟁이여야 하고 자식도 월급쟁이가 될 수 밖에 없다. 직업의 대물림이다. 그래서 근로소득세에 대한 심한 누진과세야말로 허울좋은 교묘한 계층고정화정책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한 사회가 민주사회냐 아니냐는 그 사회에서 계층의 이동이 얼마나 활발하냐 안하느냐로 가늠하기도 한다. 그런데 대부분 알몸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월급쟁이들의 소득에 대해 고율의 누진과세를 하는 것이야말로 그럴듯한 명분으로 그러한 계층이동을 원천적으로 제한하는 비민주적이고 계급사회적 장치라는 것이다.
뇌물을 주고 받는 것만이 부정은 아닐 것이다. 열심히 일한 소득,정직하게 신고한 소득엔 세금을 많이 물리고,일하지 않고 번 소득이거나 부정직하게 신고한 소득에는 세금을 적게 매기는 것도 부정이다.
○불합리한 세제 고쳐야
새정부가 부정과 비리를 추방하겠다면 이런 사실상 제도화된 부정이라 할 불합리를 근본적으로 시정해야 한다. 그를 위해선 혁명적이라 할만큼의 전반적인 세제개혁이 필요하다. 음성소득 등 지하경제만 대폭 양성화된다면 근로소득세·사업소득세·법인세 등 일과 관련된 소득은 아무리 낮추어도 세수결함이 생기지 않는다.
누가 뭐래도 사회의 중추인 월급쟁이들을 좌절케 하거나 화나게 해선 안된다. 그래서는 개혁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아리송해진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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