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명·장옥관의 근작시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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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인간은 길을 만들고 또 그 길을 버린다. 역사의 흐름이 그러하다. 변하지 않는 궁극의 길을 찾는다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 포스트 모던시대의 해체를 경험한 오늘날 젊은 세대들의 공통된 시적 감각일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무너지고 절대적 가치가 부정되는 시대가 바로 지금 우리가 투족하고 있는 시점이다. 가야할 길을 택하느냐, 가서는 안될 길을 택하느냐의 갈림길에 처한 많은 시인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이 달의 시에 나타난 중요한 특색이다.
이진명의 『사생아 같은 길이』(비평의 시대 2)와 장옥관의 『새벽에 길을 가다』(문학사상 2)는 이 시대를 살고있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두 가지 길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진명은 풍자적으로 버려진 길을 말하고 있다. 버려진 길은 자신을 만든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현실인식이다.
길은 어디에나 있고, 길은 어디에도 없다. 무책임하게 만든 길은 버려진 사생아와 같으며, 이런 시가 쓰여지는 시대는 도덕적 불감증의 시대다.
장옥관의 길에는 팽팽한 시적 긴장이 담겨 있다. 그의 시는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새벽길에도 누군가 길가는 자가 있음을 담담한 목소리로 일깨워준다. 마을의 깊은 잠을 강의 침묵으로 어루만지며, 지도를 짚어가며 그는 새벽길을 가고있다. 바위를 굴착하듯 캄캄한 어둠 속 쉽게 열어주지 않는 새벽길을 달려가는 그의 시는 살아 있는 정신으로 위험을 헤쳐간다.
그의 진술은 「저 낭떠러지 아래 무엇이 있는지도/모른 채 그저 달려가는 길 위에/삶, 깨어지기 쉬운 빙판 길은 섣달 그믐/스스로 몸 얼어 제 갈길 마련하고/저울 깊은 산」으로 응집된다. 낭떠러지 아래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위험한 길을 달리고 있다.
살아있는 정신이 깨어지기 쉬운 얼음으로 인식되는 날카로움이 없다면 그의 목소리는 산만하게 흐트러져버렸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캄캄한 새벽길을 가는 자가 어찌 동터오는 새벽을 맞이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진정한 길에 대한 갈망은 90년대 젊은 세대의 시인들에게 넘쳐 있지만 아직은 그 실체가 포착된 것은 아니다. 장옥관의 새벽길 또한 새로운 시대를 향한 하나의 출발점에 불과하다. 그가 캄캄한 새벽길에서 좀더 나간다면 어렴풋하게나마 90년대 시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을까 한다. 어둠이 짙으면 빛이 밝아오고 저울이 깊어지면 봄 또한 돌아오지 않는가. 최동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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