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꽃은 시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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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꽃은 시들고’ - 오세영(1942 - )

꽃은 시들고

물은 마르고

깨진 꽃병 하나

어둠을 지키고 있다.

아, 목말라라.

금간 육신,

세시에 깨어 자리끼를 찾는

꽃병은 귀가 어둡고

세상은 저마다의

꽃들이다.

깔깔 웃는 백일홍

킬킬 웃는 옥잠화.

세시에 깨어

귀를 모으는

금간 꽃병 하나.


최근『오세영시전집』두 권이 상자되었다. 시와 싸워온 시인들의 모습은 대체 초췌하다. 나는 그 초췌함이 좋다. 그러니까 1965년 데뷔 이후 42년이 되었다. 내가 잠든 사이 꽃은 시들었을지언정 지진 않았다. 품에 안고 살아온 시의 꽃들. 분명 나의 꽃들이다. 지금 꽃은 금간 꽃병에서 잠깬 나를 바라본다. 꽃과 나는 서로 자리끼를 찾는다. 평생 시의 꿈을 꾸다 왔다. <고형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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