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입 낙방하자 신문배달/「젊은 서울시장」김상철씨의 행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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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서울법대 수석졸업… 박 대통령에 “겁없는 건의”도/인권변호사로 활약… 13대총선때 정계입문 좌절
신문배달 소년이 수도서울의 장이 됐다. 인권변호사로 더 잘 알려진 김상철 신임 서울시장(46)이 걸어온 길은 한편의 드라마를 연상케한다.
그는 용산중 재학시절 자타가 인정하는 수재였지만 5·16혁명이 가져온 새 입시제도로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새로 생긴 체력검사 점수가 밑바닥을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6개월 가량 신문배달을 하며 집 근처 삼각시장안에 있던 헌 책방에서 문학작품들을 섭렵했다. 사고의 깊이를 더하고 훗날 변호사로서,신문 칼럼니스트로서의 밑거름이 됐던 셈이다.
이듬해 서울고에 진학한 그는 줄곧 전학년 수석을 다투면서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할 무렵 그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서울대 수석졸업자들을 오찬에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겁도 없이 『학생들이 불의를 보고 저항하는 것은 나라와 겨레의 장래를 위해 다행스런 일이다. 젊은이들에게 그같은 정신이 없다면 훗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정부는 가급적 학생들에 대한 강경조치를 발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건의했다. 이것이 빌미가 돼 임기 1년을 남겨놓고 있던 이한기 법대학장이 돌연 중도하차했다.
졸업 이듬해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법관으로서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아직도 그가 잊지 못하는 사건이 금속공학계의 독보적 존재인 김철우박사(현 포철산업과학기술연구소 고문) 간첩사건이다. 포철건설을 위해 박 대통령의 초빙을 받은 재일동포였던 김 박사는 북송된 누이동생 탓에 북한을 드나든 것이 문제가 돼 구속된 뒤 사형을 구형받았다. 그러나 주심 법관이었던 그는 양형 결정과정에서 뜻을 굽히지 않았고 수차례 합의 끝에 재판장이 양보,이례적으로 징역 8년을 선고했다.
79년 12월 법복을 벗은 그는 85년 4월 대우자동차 파업사건을 수임하면서 인권변호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김근태씨 사건,서울 미 문화원사건,권인숙씨 성고문사건 등 잇따른 시국사건의 변론을 맡았다. 이를 계기로 김영삼대통령과도 알게 됐다.
13대 총선을 앞둔 88년 1월 그는 「우리 정의당」을 창당해 정치인으로의 변신을 시도했으나 서울 강남갑에서 낙선,좌절하고 변호사의 길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후 그는 주로 우파적 관점에서 감칠맛 나는 칼럼을 썼다.
김 대통령이 40대인 그를 서울시장에 발탁한 것은 다소 의외지만 장차 단체장직선에 대비한 포석이라는 분석도 있다.
부인 최원자씨(46)와 1남1녀.<신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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