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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경제 교과서 다시 쓸 판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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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18면

6일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 중회의실. 수출업체 관계자들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회의실 가운데엔 ‘환율 하락에 따른 수출업계 대책회의’란 플래카드가 무겁게 걸려 있었다. 참석자들은 “중소기업은 수출 포기 상황에 이를 정도로 환율 하락이 심각하다”고 호소했다. 최근 미끄럼질하는 환율이 긴급회의를 열 만큼 분위기를 다급하게 만든 것이다. 이에 앞서 3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화는 전날보다 달러당 3.7원 내린 918원으로 마감했다. 외환위기 이후 최저치인 지난해 12월 7일 913원을 기록한 뒤 처음으로 920원 밑으로 떨어진 것이다.

사정이 급하게 돌아가자 정부도 연일 ‘구두탄’을 쏴대며 간접적인 시장 개입에 나섰다. 김성진 재정경제부 국제업무정책관(차관보)은 6일 라디오 방송에서 “여러 지표로 볼 때 원-달러 환율은 상당 부분 고평가됐다”고 했다. 앞서 재경부는 3일에도 언론에 이례적으로 자료를 배포해 “환율이 거시경제 여건과 괴리된 느낌”이라고 우려했다.

97년 초 800원대이던 환율은 한국경제가 풍전등화에 놓이면서 그해 말 1900원대로 치솟았다. 수술대를 거쳐 안정세를 보이던 환율은 2000년 1100원대로 낙하했다. 그러나 다시 슬금슬금 오르던 환율은 2002~2005년 1300원대를 기록하는 강세를 보이다 현재 9
10원대까지 내려앉았다. 특히 2005년 이후 하락세에 속도가 붙고 있다.

환율이 이처럼 하락하는 이유는 뭘까. 최근 들어 속도가 붙는 까닭도 궁금하다.

일단 환율도 수요와 공급의 원리로 결정된다. 달러가 풍족해 몸값이 싸지면 거꾸로 원화 가치는 올라간다(환율 상승). 그런데 최근 달러가 넘쳐나고 있다. 하나은행 조휘봉 외환딜러는 “최근 흐름만 봐도 중공업ㆍ조선업체가 호황으로 대규모 달러를 벌어들이는 데다 주식시장 활황으로 외국인들이 달러를 들여와 원화로 바꾸는 바람에 가치가 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수출은 지난해 12월 사상 처음으로 연간 3000억 달러를 돌파하는 신기원을 세우는 등 호조를 지속하고 있다. 중국 특수가 기폭제가 됐다. 2000년 1723억 달러이던 수출은 지난해 말 3254억 달러로 7년간 90% 늘었다. 삼성경제연구소 전영재 연구원은 “미국은 올 1분기 성장률이 1.3%로 급락하면서 경제 하강폭이 예상보다 확대됐다”며 “그러나 고용ㆍ소비 등을 볼 때 연착륙할 것으로 보여 한국 수출에 미치는 영향도 크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증시 활황도 이런 흐름을 부채질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자본수지에서 증권투자수지는 지난해 10월부터 내국인의 해외투자가 늘면서 5개월 연속 적자였으나 4월부턴 흑자로 돌아섰다. 외국인 달러가 그만큼 많이 들어온다는 소리다.

달러가 오죽 넘쳐나면 정부가 ‘제발 밖으로 나가 돈 좀 써 달라’고 재촉할 정도다. 재정경제부는 올 초 규제를 풀어 100만 달러이던 개인의 해외 부동산 투자 한도를 300만 달러로 늘리고, 국내에서 설정된 해외펀드에 투자하면 이익금에 3년간 세금을 물리지 않기로 했다. 여기에 유학ㆍ해외여행이 크게 늘면서 서비스 수지가 해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해외펀드 투자도 크게 늘었지만 몰려드는 달러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넓게 보면 미국의 ‘약(弱) 달러’정책도 중요한 배경이다. 달러는 2002년부터 약세를 보여 왔다. 미국의 쌍둥이(경상ㆍ무역) 적자로 달러의 위상이 약해진 탓이 크다. 물론 미 정부가 ‘약 달러 정책을 쓴다’고 공언한 적은 없다. 뉴욕 타임스는 최근 미국이 올해 약 달러에 힘입어 사상 처음으로 기업이 해외에서 번 돈이 국내에서 번 돈을 웃돌며 ‘수출 주도형’ 경제로 갈 것으로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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