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3부] 가을 (9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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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림=김태헌

엄마는 다시 고개를 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녕, 그건 옳은 일이 아니야. 너는 매사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하는 아이가 아니야. 엄마가 그렇게 말하면 그런 거잖아. 그럼 됐잖아. 누구한테 무엇을 더 보여주고 싶다는 거야? 그건 좋은 일은 아니고, 그건 옳지도 않고. 너만 더 상처입게….” 엄마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방안을 서성대더니 나를 향해 돌아섰다.
 
“안 돼 위녕.”
 
엄마의 목소리는 약간 메어 있었다.

“그렇게 하고 싶어, 엄마.”
 
나는 오래 결심해 온 일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차분했다. 엄마는 내 태도를 보고 더욱 놀라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입술을 깨물며 방안을 서성거렸다. 머리를 비비다가 고개를 외로 꼬고 창밖을 보다가 그리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때 엄마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하지만 엄마의 얼굴은 뜻밖에도 차분하고 결연했다.

“언제부터 이런 결심을 했던 거니?”
 
엄마는 천천히 내게 물었다. 나는 잠깐 망설였다.

“모르겠어…. 딱히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 엄마 집으로 올 결심을 할 때부터였던 거 같아.”
 
엄마는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않더니 다시 물었다.

“생각을 바꿀… 의향은… 없니? 그건 말하자면 부질없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의 얼굴로 와락 어떤 감정이 밀려 올라왔다. 엄마는 그것을 다시 꿀꺽 삼키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럼 이렇게 하자. 엄마랑 함께 E시로 가자. 네 아빠 집에는 가지 못하겠지만 엄마가 데려다줄게.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동안 거기서 기다려줄게. 그리고 네 새엄마나 아빠가 물으면 말해. 이 모든 것이 엄마의 책임이라고.…. 엄마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결국 엄마의 책임이기도 한 거니까.”
 
마지막 말을 하면서 엄마는 돌아서서 창밖을 내다봤다. 뒷모습이었지만 나는 엄마의 얼굴이 멍해진 것을 알았다.
 
“아니야, 혼자 갈래 엄마.”
 
엄마는 나를 바라보더니 걸어와서 책상에 앉아 전화기를 들었다. 내가 엄마의 수화기를 든 손을 잡았다. 엄마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이런 말을 듣고 엄마가 어떻게 아저씨랑 여행을 가니? 여행 취소해야겠어 손 놔, 이 녀석아.”
 
“엄마… 혼자 가게 해줘. 부탁이야.”
 
엄마는 수화기를 들고 힘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젠 무섭지 않아. 예전에는 아무도 없어서 무서웠는데 이젠 엄마가 날 기다리고 있는 걸 알잖아. 이젠 내가 거기서 쫓겨나도 돌아올 집이 있잖아. 그러니까 무섭지 않아. 내가 말을 하면 날 믿어주는 가족들이 있잖아. 그러니까 무섭지 않아.”
 
엄마는 머리칼을 비비며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도둑으로 몰려서 종아리 백 대 맞은 거… 그럴 수 있는 거야, 위녕. 친엄마라도 그럴 수 있어. 네가 하는 말을 다 거짓말이라고 몰아붙이는 거… 그것두 그럴 수 있는 거구, 엄마가 널 키웠다고 해도 그랬을지도 몰라. 방 치우지 않았다고 더러운 속옷을 옷걸이에 걸어 놓은 거…. 그거 그럴 수 있는 거야. 설거지 안 해서 밤에 자다 일어나 혼난 거, 그것두… 친엄마라도 그럴 수….”
 
엄마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책상을 가볍게 쿵, 하고 쳤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십 년 만에 다시 엄마를 만났을 때처럼 엄마는 다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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