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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 「감량경영」 안간힘(EC단일시장에 가다: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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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미·일 이기자” 덩치보다 실속다지기 한창/전유럽 통합대비 동구진출 붐/예고된 「연대노조」 대책 서둘러
유럽공동체(EC) 시장단일화를 간단히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미국·일본에 맞서 유럽경제를 활성화시키고 경쟁력을 갖도록 각종 장벽을 철폐하는 것이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경제의 주체인 개인이나 기업들이 경영하기에 좋은 분위기,즉 상품과 사람·자본·서비스의 자유이동을 보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이탈리아의 경제학자 파올로 체치니는 이미 4년전 EC의 시장단일화가 성사되면 EC전체적으로 ▲연간 5%의 경제성장 ▲5백만명의 고용창출 ▲물가안정 및 공공부문의 부채감소 등의 추가적인 효과가 기대된다고 밝힌바 있다. 이는 역내 국민총생산(GNP)이 약 2천5백억달러 느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전망은 온통 장미빛 일색으로 EC통합론자들은 틈만 나면 이를 통합의 명분으로 인용하고 있다. 실제로 EC역내교역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88년 이후 지금까지 EC전체적으로 1백50만명의 신규고용창출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어 그의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그러면 과연 EC의 시장단일화는 이처럼 긍정적인 면만 갖고 있는 것일까. 『EC 시장단일화는 유럽인의 오랜 꿈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유럽인을 빈부의 2계급으로 나누는 악몽이 될 수 있다.』
세계 최대의 엔진제작 그룹인 스위스 ABB(Asea Brown Boveri)사 퍼시 바네비크 회장의 이같은 진단은 EC시장 단일화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매사가 그렇듯 EC시장단일화도 긍정적인 효과 외에 부정적인 면도 갖고 있는 것이다.
ABB사는 EC의 시장단일화에 능동적으로 준비해 왔고 현재도 적극적인 시장단일화 전략을 수립하고 있는 EC의 대표적 기업이다.
따라서 이 회사의 과거·현재·미래를 살펴보는 것은 시장단일화에 EC기업들이 어떻게 대처해 왔고 앞으로의 전략은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는데 적절한 예를 제공해주고 있다.
ABB사는 91년 기준 세계 50대기업 가운데 35위에 랭크된 회사다. 종업원이 21만4천명으로 91년 총매출액 2백88억달러 당기순익 5억8천7백만달러를 기록했다. 이 회사는 특히 한국의 고속전철건설에 참여키 위해 프랑스·일본과 경합을 벌이고 있는 독일 ICE컨소시엄에 독일의 지멘스·AEG사 등과 함께 참여하고 있다.
이 회사는 이름에서 나타나듯 비교적 일찍부터 EC시장 단일화에 대비,기업인수합병(M&A)을 단행했다. 즉 지난 87년 스웨덴의 아세아사와 스위스의 브라운 보베리사가 합쳐 ABB사로 탄생한 것이다. 이를 추진했던 바네비크 당시 아세아사회장의 결단은 장기적 안목에서 나온 것이란 긍정적 평가를 받았고 이후 EC내에선 기업인수합병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경쟁사끼리 손을 잡거나 아예 인수,경쟁력을 강화하자는 것으로 대표적인 사례로 프랑스 르노사와 스웨덴 볼보사의 합작,독일 최대의 철강회사인 크룹사가 경쟁관계이던 독일의 회쉬사와 합병한 것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EC 최대의 산업국인 독일의 경우 시장단일화가 임박해지면서 90년 1천5백47건,91년엔 사상최대규모인 2천7건의 기업인수합병이 이뤄졌다.
이처럼 선구적으로 기업합병을 달성한 ABB사는 이후 대대적인 감량경영에 들어갔다. 덩치만 커가지고는 미일기업과 경쟁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91년까지 이 회사는 무려 5만명을 해고하면서 매출액은 합병당시보다 60%의 증가를 기록했다. 바네비크회장의 말처럼 이 회사는 「계속 성장(매출액)하면서 동시에 계속 감소(종업원)하고 있는」 셈이다.
동서를 망라한 유럽통합에 대비,벌써부터 동유럽지역 진출에 적극적인 이 회사는 앞으로도 이같은 감량경영방침을 고수할 예정이다.
EC기업의 대부분은 ABB사와 비슷한 처지에서 시장단일화를 맞고 있다.
즉 EC기업들은 각종 규제의 철폐와 규격통일·서류간소화 등에 따른 비용의 감소와 3억4천6백만명의 구매력 높은 거대한 단일시장이 주는 매력보다는 역내외의 격화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EC시장단일화를 우선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EC시장단일화는 범유럽차원 연대노조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어 기업경영환경에 적지않은 변화를 예고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우선 당장은 회원국간 경제력이나 사회복지수준,노조의 위상 등에 큰 차이가 있어 유럽연대노조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현재 기업은 기업대로,노조는 노조대로 희망과 우려속에 이에 대한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이같은 EC시장단일화는 당사자들의 거듭된 부인에도 불구하고 역외기업에 대해 배타적인 공동전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시장단일화로 인해 회원국간 규격이 통일돼 구매단위가 커지는 등 우리의 수출에 단기적으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불리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물류통합 등의 전략으로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대EC전략이 되고 있다.』
원대연 삼성구주본부장의 이같은 지적은 시장단일화 이후 EC기업들이 서로 피나는 경쟁을 하면서도 대외적으론 하나로 뭉쳐 우리에겐 점점 공략하기 어려운 요새가 돼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베를린=유재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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