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철의 ‘DVD 골라드립니다’-타인의 삶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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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14면

이야기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5년 전, 동독에서 시작한다. 확고한 신념과 탁월한 실력을 자랑하는 비밀경찰이 무고한 작가와 그의 애인을 감시ㆍ도청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러나 엿듣는 자의 내면이 변화하면서 그들 사이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

비슷한 시기에 군사독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살았던 우리로선 이 영화의 설정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무릇 이데올로기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진대, 그것이 유지되는 체제에 변이가 일어나 인간을 속박하면, 이데올로기는 괴물로 바뀐다. 자기 얼굴을 보기 전까지 자신의 추악함을 알지 못하는 게 괴물이다. 결국 ‘타인의 삶’은 인간을 만난 후 인간애를 깨닫는 괴물에 관한 우화로도 읽힌다. ‘타인의 삶’이 과거의 사실적 재현에 그치지 않고 한 편의 뛰어난 예술작품으로 승화된 건 그래서다. 영화는 교훈을 다룬 작품들이 자칫 빠질 법한 딱딱한 전개를 우회해 갔으며, 유럽산 영화가 지루하다는 편견을 가진 사람도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대중적인 요소도 두루 갖추었다. 독일의 각종 영화상을 휩쓸었던 ‘타인의 삶’은 올해 미국 아카데미에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함으로써 작품성을 두루 인정받았다.

대사와 다양한 음향을 실감 넘치게 전달하는 소리가 인상적인 DVD다. 가브리엘 야레가 맡은 영화음악을 즐기기에 그만이다. 장편영화의 음성해설이 처음이라던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은 그 말이 무색하게 이야기를 술술 풀어나간다. 5년에 걸쳐 직접 시나리오ㆍ연출ㆍ편집 등에 심혈을 기울인 자의 자신감이 목소리에 묻어난다. 부록으로 제작과정을 담은 ‘메이킹 필름’(20분)과 7개의 삭제장면(9분)을 제공한다. 그중 감독이 끝까지 삭제를 망설였다는 장면을 찾아보길 권한다. 감시받는 일상과 통제사회의 암시장 모습을 짧은 순간에 잘 담아낸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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