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수석, 5공경제 기틀 잡아|"국정추진 군 출신 만으론 역부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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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25면에서 계속>
이미 언급한 것처럼 80년 4월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정부장 서리 직을 겸직한데 이어 5·17, 5·18, 국보위설치, 최대통령 하야 등의 과정을 거쳐「대통령 전두환」이 탄생한다.
군부엘리트들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작업이었고, 적지 않은 숫자의 학자·관료·언론인 출신들이 군부에 적극 협조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신 군부「창업공신」들에 의해 발탁됐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들의 눈밖에 나서는 직위를 유지하기 힘들었던 민간출신 파워엘리트들은 5공 정권이 수성단계로 접어들면서 점차 힘이 세 지기 시작했다.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대통령의 신임을 더 많이 받게 되었다.

<암암리「실세」발휘>
많은 이들은 그 같은 유형의 상징적인 인물로 고 김재익 경제수석을 꼽고 있었다. 82년에 들어서는 김 수석이 암암리에 두 허씨를 능가할 정도의 파워를 발휘했다고 회고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 때문에 전씨의 친·인척들에게 극도로 미움을 사는 등 다른 요인도 있었지만 두 허씨는 결국 민간출신들에게 밀려난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만만치 않다. 물론 그 선택권은 어디까지나 전대통령이 행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권의 형성기이던 80년 국보위시절은 달랐다.「개혁」을 앞세운 신 군부는 수단보다 목적달성을 우선 시 했다. 공무원 숙청이나 언론통폐합이 대표적인 실례였다. 이 같은 분위기와 관련해 한 관계자는 김재규의 재산처리에 얽힌 일화 한 토막을 소개했다.
『신 군부에서 한때 김재규 전 정보부장(80년 5월24일 처형)의 많은 재산을「적법하게」 환수할 수 없을까 하고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상 강제인 자전헌납방식이 아무래도 꺼림칙했던 가 봐요.
그래서 세법에 밝은 재무부 관료 L씨를 불러 국사범인 김재규의 재산을 세금으로 흡수할 방안을 찾아보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 관료는 즉각「방법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재산에 과세하려다 가는 여기 계신 분들도 조세범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라고 지나칠 정도로 소신 있게 답변했어요. 저러다가 목이 잘리지 않을까 하고 주변에서 걱정해 줄 정도였지요』.
L씨의 설명인즉 우리나라는 법에 열거한 사업이나 수익에만 과세하는「열거주의」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소득이든 순 자산이 늘어나면 그만큼 세금을 더 매기는 미국 같은 나라(포괄주의)와는 제도자체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김재규가 누구 건, 재산을 어떻게 모았건 간에 소득세법이 명시된 항목에 해당되지 않는 이상 과세할 수 없고, 무리해 포괄주의 입장을 취하려다 가는 자칫하면 국민전체가 조세범 화 할 우려가 있다는 설명이었다

<"김재규 재산 뺏어라">
지금도 현직 공무원인 L씨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국보위에 불려 간 것은 아니었고, 지시계통을 통해 김재규 재산에 대한 과세방안을 강구하라는 명이 떨어져 검토 끝에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올렸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 의하면 신 군부는 결국 김의 재산 귀 세금으로 흡수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이 일을 계기로 80년 말 세법개정 때「김재규 조항」이라고 불려도 좋을 항목이 삽입됐다. 즉 김이 재산을 늘린 주된 방법으로 지목된 사례금(커미션)과 알선수수료 등 두 가지가 과세대상 소득에 새로 포함된 것이다(소득세법 시행령 49조2항).
두 허씨의 입김이 가위 무소 부위였던 80년 5월 재무부차관 발령을 앞둔 박봉환 씨(60· 현 손해보험협회장)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부터『차관으로 영전하면 앞으로 시간을 내기 어려워질 테니 당신과 똑같은 사람 한 명 추천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당시 경제과학 심의 회 사무국장이던 박씨는 전 사령관의「경제가정교사」였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전두환 장군은 10·26이전부터 경제과외를 따로 받고 있었다 그는 매우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박봉환씨는 자신의 후임「독선생」후보로 두 명을 추천했다 재무부 국제금융국장이던 이규성씨(54·전 재무장관)와 기획원기획국장이던 김재익 씨였다. 출중한 실력은 물론 사심이 없고 고도의 균형감각까지 갖추어야만 넘버원 실세의 가정교사 자격이 있다고 박씨는 판단했다.

<기획원국장서 발탁>
두 사람의 약력과 추천사유를 들은 전 사령관은 아무말 없이 김재익씨 쪽에 낙점 했다. 이 순간이 김재익씨 개인으로는 46세의 이른 나이에 버마(미얀마)에서 유명을 달리하게 된 사실상의 갈림길이었다 .
전 장군은 80년 9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김씨를 경제수석에 임명했다 그리고 김 수석을 전적으로 밀어 주면서 성장·물가·국제수지의 이른바 세 마리 토끼를 잡은 5공 경제치적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대목은 전대통령의 용인 술이 돋보이는 부분이기도하다.
김 수석은 일반의 선입관과는 달리 정치력도 상당했다. 그는 두 허씨와도 크고 작은 갈등을 빚었고 수 차례 사의를 표명했지만 결국 청와대를 떠난 것은 허씨 쪽이었다. 김 수석이 이겼다 기 보다 최고 통치자가 한쪽의 카드를 버리기로 작심한 탓이었다. <노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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