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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림|신춘「중앙문예」단편소설 당선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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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차창 너머로 가로수가 무리 져 떼밀려 갔다. 빠르게 도막나는 풍경들을 가로지르며 쓰레기 수레 한대가 느릿느릿 굴러가다간 이내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뒤로 처진 수레를 쳐다보았다. 형광 빛이 도는 주황색 유니폼을 입은 청소부와 수레는 점점 작아지다가 이윽고 한 개의 점이 되어 사라졌다. 바람이 불어왔다. 머리카락이 불 불이 일어났다.
나는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버스의 진동 때문인지 골치가 지끈거렸다. 학교에 들러 기혁을 만나고는 곧장 공항으로가 어머니를 배웅해야 하는데…. 벌써 지쳐 버린 기분이었다. 하긴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던 아침 지하철에서부터 이미 지쳐 있었는지도 몰랐다. 시루에 갇힌 콩나물처럼 얼굴만 쭉 빼고는 이런 게 바로 지옥이구나, 실감했으니까. 대여섯 가지 검사에 세 시간씩이나 줄을 서야 했던 병원에선 울컥울컥 올라오는 짜증이나를 더 지치게 만들었다. 욱신거리는 눈을 두어 번 끔벅이며 나는 앉은 채로 팔짱을 꼈다. 양복 안주머니에 넣어 둔 편지 봉투가 팔짱 낀 손등으로 느껴졌다. 벌써 사흘 전에 받은 영주 편지였다. 마당 구석에 떨어진 그것을 아무 말 없이 주워 수첩에 끼웠을 뿐 나는 아직도 뜯어볼 엄두도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 정류장은 학교 앞입니다. 내리실 분은…. 안내방송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버스가 멎었다. 주위를 둘러볼 겨를도 없었다.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입사서류 봉투를 집어들며 나는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내친김에 횡단보도까지 달려왔을 땐 신호등이 막 빨간 불로 바뀌고 있는 중이었다. 횡단보도 중간쯤에서 몸집이 큰 중년 여자가 손을 치켜든 채 달음질을 치고 있었다. 여자의 살집 좋은 궁둥이를 향해 자동차 경 적음이 사납게 울었다. 서너 걸음 내디뎠던 사람들 몇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또 지각이군. 인도로 올라선 남학생이 혼잣말로 지껄였다. 급하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마주 보이는 정문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정문 위에 매달린 둥근 시계는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2시반 약속이니 벌써 30분이 지난 셈이었다.
나는 좀 짜증스럽게 신호등에 눈을 박았다. 여전히 위쪽동그라미(나는 언제나 색보다 위, 아래에 더 익숙한 편이다), 그러니까 빨간 원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빨강이라는 이름의 불이 들어와 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신체검사 생각이 났다.
이게 14로 보인단 말이지요? 검사 표를 넘기다 말고 검사관이 양미간을 찌푸렸다. 낭패였다. 그럴 줄 알았으면 학교 때처럼 색맹검사 책자를 구해 들춰보고라도 갔을 것이다. 사무직 지원인데 설마 색맹검사까지 하랴,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게 잘못이었다. 검사관이 다른 페이지를 열었다. 이건 요? 크고 작은 점들이 어지럽게 찍혀 있을 뿐 아무 글자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눈을 끔벅였다. 역시 보이질 않았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검사관을 쳐다보았다. 입술을 앞으로 죽 내밀고 두 눈을 치켜올린 채 나를 지켜보던 검사관은 눈이 마주치자 씩 웃었다. 그 웃음이 꼭 이놈아 널 끼워 줄 순 없어,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적록색맹 이 시 군요. 검사관이 짧게 말했다. 그리곤 마치 위로라도 할양처럼 이렇게 덧붙였다. 가만 있자, 무슨 부에 지원을 하셨더라. 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다지 큰 문제는 없긴 합니다만….
졸업 이후 네 번이나 치른 입사시험이긴 해도 신체검사를 받아 보긴 처음이었다. 어머니성화에 못 이겨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면서도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갔다. 신입사원이 양복 입어 해될 건 없다는 거였다. 벌써 합격한 건 아니라고 못박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시험을 잘 치른 것 같다는 자신감도 없진 않았지만 그 동안의 고배가 혹 아버지 때문이 아닌가 하는 어머니의 근심을 부추기고 싶진 않았다.
어머니에게로 생각이 미치자 나는 머리 속으로 시간을 가늠하기 시작했다. 기혁이와 얘기가 일찍 끝난다면 집으로 가 아예 어머니를 모시고 나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언뜻 본 것만 해도 큰 트렁크 두 개와 좀 작은 가방 하나는 되는 것 같던데…. 아버지께 드릴 속옷들과 각종 밑반찬들, 주위의 암 환자 가족들에게 귀동냥으로 얻어듣고 가까스로 구해 낸 온갖 종류의 특효약들. 내 눈치를 봐 가며 마련한 그것들을 챙기느라 어젯밤 어머니 방에선 밤새도록 불빛이 새어나왔다.
아버지가 위암에 걸려 베를린의 한 시립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을 들은 것은 한달 전이었다. 아버지의 유학 시절 친구였던 최 교수님에게서 이었다. 5년 전이던가. 아버지와 함께 살던 독일 여자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을 끝으로 아버지에 관해 선 아무 소식도 들어보지 못한 우리 모자였다. 암이라니…. 비록 얼굴도 모르긴 하지만, 어쨌든 내 아버지라는 사람이 이역만리에서 혼자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묘한 슬픔을 느끼게 했다. 어머니는 하루아침에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 그렇게 한 사흘을 앓는 것 같더니 다시 어머니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뭔가를 구하고 알아보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어머니의 눈에는 이제껏 내가 보지 못했던 생기마저 깃들여 있었다. 어쩌면 어머니는 이렇게나마 아버지와 만날 것을 고대해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공연히 씁쓸했다.
아무래도 내가 독일에 한번 다녀와야겠다. 지난 일요일 오후에 설거지를 하던 어머니는 문득 지나가는 말처럼 입을 열었다. 벌써부터 짐작을 하고 있었으면서도, 아니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어머니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뜻 그러세요, 대꾸가 나오질 않았다. 이제 와 새삼스럽게 아버지를 미워하고 말고 해서가 아니었다. 아버지를 용서하고 말 것이 있다면 그건 오롯이 어머니 몫이라는 게 진작부터의 내 생각이었다. 그저, 어머니가 아직껏 아버지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는데 화가 났다 고나 할까.
빨간 불이 꺼지고 아래쪽 녹색 불이 켜졌다. 길을 건너려다 말고 나는 습관적으로 옆 사람을 흘끗 살폈다. 가방을 옆구리에 낀 남학생이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제길.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학교에서 수업시작을 알리는 차임벨이 울렸다.
아침만 해도 제법 썰렁하더니 낮 기온은 여름 못지 않았다. 정문을 지나면서 나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뛰는 것도 쉽진 않았다. 걸음을 늦추며 학교 안을 둘러봤다. 4년을 다닌 학교였지만 지나가는 학생들 모습도, 고색 창연한 벽돌 교사도 이상하게 남의 집처럼 낯설었다. 하긴 그럭저럭 반년 만이다. 쫓겨 나는 기분으로 졸업을 하고 별 이유 없이 발길을 끊었다.
가을 학기 새벽 토플 반 개강이란 현수막이 머리 위에서 펄럭였다. 작년 이맘때 나도 들은 적이 있는 강의였다. 그새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 현수막에 씌어진 글자 한 자 한 자를 나는 음미하듯 읽어보았다.
본관으로 이어지는 중앙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쪽에 게시판이 보였다. 강일고 동문 정기 모임, 사진반에서 참신한 신입생을 모집합니다. 공대 가을 MT 대성 리에서…. 크고 작은 벽보들이 닥지닥지 불어 있었다. 4천 민주 학우에게 드립니다. 큼지막한 대자보가 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원서를 든 안경 잡이 하나가 대자보에 바싹 얼굴을 디밀고 있었다. 콜라 캔과 팝콘을 각각 하나씩 안은 여학생 둘 역시 연신 입을 오물거리며 대자보를 읽고 있었다. 30분 째 기다리고 있을 기혁의 생각이 잠깐 났지만 나는 대자보 앞으로 다가갔다. 호기심보다 옆에 선 학생들을 흉내내고 싶은 마음이 더 많았다.
-소련 쿠데타의 실패는 한국 정권에 반공, 반 사회주의의 기치를 더욱 높일 수 있는 구실을 주고 있습니다.
국민들로 하여금 운동권이 더 이상 아무런 명분도, 전망도 없음을 믿도록 유도해 운동권을 국민 대중으로부터 소외시킴과 동시에 나아가서는 민중투쟁을 단죄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백만 학도는 정권의….
사랑, 전진, 투쟁, 그리고 승리를 위한 힘찬 2학기의 첫 포문을 열어 젖히자! 느낌표와 함께 대자보는 끝을 맺었다. 고개를 들자 중앙로 양쪽으로 도열한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뭐가 그리 심각했는지 저 그늘 아래를 땅만 보고 걸어다녔었지. 쓴웃음이 나왔다. 플라타너스가 이파리를 흔들었다. 누런 낙엽 한 장이 힘없이 떨어졌다. 누군가 나를 불렀다.. 과 후배 창 식이었다. 그 뒤로 알 만한 얼굴들이 몇 눈에 띄었다.
『팔자 좋으시구랴. 이 시간에 모교 방문을 다 하 시구.』
『어, 그래. 잘 들 있었니?』
『우리야 뭐 맨 날 그렇지. 어떻게 직장은 잡았어요? 형, 아주 신수가 좋아졌습니다.』
녀석이 내 차림새를 위 아래로 훑었다.
『뭐 그냥 그렇다. 언제 술이나 한번 하자.』
창식의 맡을 중간에서 자르며 나는 갈 길이 바쁘다는 시늉을 했다. 녀석 말 마 따나 모교 방문도 좋고 반가운 것도 좋지만, 안 해도 될 실업 6개월까지 들춰내는 건 그다지 즐거운 일이 못될 것 같았다. 창식 일당이 왁자 지껄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들었다. 덩달아 손을 흔들고 돌아서는데 내가 입은 양복바지 자락이 눈앞에서 펄렁거렸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청바지와 남방, 티셔츠에 운동화…. 언뜻 보아도 나 같은 양복 차림은 눈에 띄지 않았다. 역시 오는 게 아니었는데…. 하긴 오늘 아침 기혁의 전화를 받을 때부터 내키지 않긴 했다.
입학 동기인 기혁은 군대다, 휴학이 다로 이제 3학년에 다니는 친구다. 할 얘기도 있고. 아니 뭐 대단한 건 아니다. 술잔이나 기울이자는 거지. 야, 인마, 오랜만에 얼굴 좀 보자. 졸업하면 다냐. 새카만 후배들 틈에서 공부하는 이 복학생 위로 공연도 좀 하고 살아라. 기혁의 으름장에 나온다고 하긴 했지만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이내 후회가 됐다. 뭐랄까. 그저 부담스러웠다 고나 할까. 학생도 아닌, 그렇다고 기성세대도 되지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게 학교란 공간은 추억도 뭣도 아니었다. 이념과 이념의 어지러운 혼돈은 지난 4년으로 족하지 않을까. 저마다 질러 대는 그 무수한 구호들 속에서 내 목소리를 찾느라 고심할 생각은 더 이상 없었다. 기혁이 말하는 할 얘기라는 것도 그랬다. 한편으론 궁금하기도 하면서 번거롭고 귀찮은 일은 아닐까 은근히 걱정이 됐다.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담쟁이덩굴이 이리저리 손을 뻗고 올라간 학생회관 건물이 저만큼 보였다. 방위 병으로 제대를 하고 2학년에 복학했을 때, 이미 졸업반인(그래서 꼭 손위 누나를 대하는 것처럼 서먹했던)영주를 저 담쟁이덩굴에 기대어 허겁지겁 안았다. 정말 군바리 티 낼 거야? 깔깔대던 영주의 웃음에 귓불까지 벌개졌었는데…. 주머니 속의 편지생각이 났다. 왠지 모르지만 영주가 무슨 얘기를 썼을 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1주일 전엔가 그녀에게 걸었던 마지막 통화가 생각났다.
니 목소리 듣기가 왜 이렇게 힘드니? 여보세요, 하는 그녀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어리광 섞인 불평부터 했다. 영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울리는 전화벨소리, 사람들 목소리, 컴퓨터 단말기에서 들리는 불규칙적인 기계 음…. 이런 소음들이 들쭉날쭉 귀를 쑤셨다. 바쁜 모양이구나. 한참 만에야 내가 입을 열었다. 응, 조금…. 그냥 건 거면 나중에 내가 연락할게. 잠시 후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나서 받은 게 그녀의 편지였다.
휴게실은 복잡했다. 숨을 몰아쉬며 실내를 둘러보았다. 기혁은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보았다. 약속 시간으로부터 이미 40분이 지나 있었다. 그 정도시간을 못 기다릴 친구는 아닌데…. 어쨌든 기다려 봐야 할 것 같았다. 여학생 하나와 남학생 둘이 있는 구석 의자로 가서 엉거주춤 자리를 잡았다. 맞은편 창가에 앉아 기타 줄을 퉁기던 녀석 하나가 기분 나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곳 휴게실 풍경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내 모습이 못마땅하다는 투였다. 하긴 양복차림에 누런 서류봉투까지 끼고 어슬렁어슬렁 나타났으니 모르긴 해도 창 비 전집이나 타임지를 팔러 나온 별 볼일 없는 외판원쯤으로 보이겠지. 녀석이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기타 줄을 퉁기기 시작했다. 잘 기른 녀석의 단발머리가 수그린 턱 끝에서 찰랑거렸다.
멋 적게 앉아 있기도 뭣해 커피나 한 잔 뽑을까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 판매 기 옆으로 공중전화가 보였다. 신체검사 끝나면 전화를 하라던 어머니 말이 생각났다. 무심결에 동전을 뒤지다 그만 두었다.그저 잘 치렀다고 만 하면 될 일인데도 내키질 않았다. 적록 색맹 이시군 요. 검사관의 비식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신체검사를 마치고 학교까지 오는 동안 그 웃음이 줄곧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니 왠지 모를 짜증이 치밀었다. 나는 거칠게 커피 판매 기 버튼을 눌렀다.
옆에 앉은 세 학생들 쪽에서 담배 연기가 넘실넘실 날아왔다. 입에 담배를 문 더벅머리 남학생이 여자 친구 담배에 불을 붙여 주고 있었다. 여학생이 연기를 후 뱉었다. 졸업 전에도 더러 학교 구석에서 담배를 피워 문 여학생들을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어쩐지 보기가 어색했다. 세상 참 많이 달라졌단 말야.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내가 늙은이처럼 느껴졌다. 더벅머리가 투박한 사투리로 입을 열었다.
『어제 뉴스 봤냐? 야, 정말이지 레닌 동상이 허리까지 잘려 뿌러서 그래 내려 오니카니 맥이 탁 빠져 뿌리 드라마. 우째됐 건 마르크스, 레닌이 그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기가? 어째 가심이 쩌릿쩌릿카기도 하고 섭섭키도 하고 아무튼지 마, 기분이 영 말이 아니드라.』 마주 앉아 있던 말라빠진 친구가 말을 받았다.
『대접은 무슨 대접? 결국 그게 다 역사의 법칙일텐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나는 양복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보풀이 일어 네 귀가 해실 해실 해진 편지봉투가 딸려 나왔다. 그것을 무릎 위에 놓고 잠깐동안 쳐다보다가 나는 봉투를 뜯었다. 편지는 두 장이었다. 한쪽으로 씰그러진 영주의 글씨가 우르르 쏟아졌다.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할까. 글쎄, 뭐라고 해도 너한텐 변명으로밖엔 안 들리겠지. 하지만 그 진부한 변명을 늘어놓는 게 바로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이니 어쩌겠니? 너 두 그렇겠지만 나 두 구질구질한 건 질색이야. 그러니까 그냥 들어줬으면 좋겠다.…
더벅머리 목소리가 다시 끼어 들었다.
『뭐꼬, 그라믄 니는 공산주의가 이참에서 막을 내렸단 말 이가?』
-짐작은 하고 있었겠지만 솔직히 지난 몇 달 동안 무척 피곤했어. 왜 그런 거 있잖아. 나이 찬 여자에 대한주변의 지나친 친절 내지 관심 말야. 처음엔 귓등으로만 들었는데 그것도 반복되니까 못 견디겠더군. 게다가 슬슬 내 인생이 갑갑하단 생각도 들었어.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건지도 모르면서 운전대만 잡고 있으면 뭘 해?….
말라깽이가 핏대를 올렸다. 시내가 말하는 역사의 법칙이 사회주의라는 이념 자체의 패배를 얘기하는 건 아냐. 소련이 지금 겪고 있는 혼란은 결국 더 이상적이고 더 현실적인 사회주의로 나가기 위한 과정이 아니겠냐? 레닌의 허리가 잘린다고 해서 노동의 가치나 분배의 공정성이라는 기본 이념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 잖 아.』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하는 기분으로 선도 봤어. 너무 잘난 척을 하는 게 꼴불견이긴 했지만 아주 싫지는 않더라. 물론 니 생각도 했어. 아니, 너라기보다는 우리가 함께 보낸 몇 년이었겠지. 그 시간은 뭔가 싶더라.…
『글쎄, 니 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만 내 보기엔 소련이나 동구라파나 결국 70년 역사를 철저히 허비한 것으로밖에 안 보이는 기라.』
담배를 물고 있던 여학생이 더벅머리 말을 중간에서 막았다. 보기와는 달리 목소리가 하이 소프라노였다.
『과연 역사에 허비 라는 것이 있을까. 게다가 소련 공산당 자체를 공산주의의 이상 내지 표본으로 보는 것엔 문제가 있다고 봐. 소련 공산주의는 종주국을 표방하긴 했어도 자본주의 사회도 거치지 못한 채 직접 공산주의로 이행한 한계가 있거든. 스탈린 이후엔 공산당 자체가 이미 파쇼화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구. 그런 소련을 사회주의의 대명사로 보고 성급히 결론부터 내리는 건 좀 문제가 있지 않을까?』
-이제 와 새삼 그 시간들을 아까워하거나 너 만난 걸 후회하는 건 아냐. 어떤 형태였든 시간은 결국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는 게 내 생각이니까. 잘 있어. 그리고 오해는 마. 널 떠나 엊그제 만난 그 작자한테 가는 건 아니니까. 그냥 지쳤어. 아니, 잘 모르겠어. 머리가 뒤죽박죽이란 것밖에는….
더벅머리가 입맛을 쩝 다시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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