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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품 애용」늘어 급속 신장-라디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최초의 국산 라디오인 금성사의 진공관식 A-501 라디오는 『럭키가 구리무로 돈 조금 벌더니 쓸 때 없는 짓 한다』는 비웃음 속에서 태어났다.
59년11월, 1927년 경성방송국의 개국과 함께 「소리통」이 이 땅에 들어 온지 32년만 이었다.
그후 32년이 지난 요즘 우리나라에서 라디오에 대한 자료는 찾아보기조차 힘들다.
상공부나 전자공업진흥회 등 어디에서도 라디오생산통계를 따로 집계하지 않고 있으며 관세청도 라디오를 수출품목 분류에서 아예 없애 버린 지 오래다.
17년 동안 오디오 개발만 담당해온 금성사 이만수 책임연구원은 『가전 3사가 라디오 전용 생산라인을 철거한 85년을 고비로 라디오는 이미 「산업」으로서의 의미를 잃어버린 셈』이라고 말했다.
그후 라디오는 오히려 카셋이나 콤팩트디스크, 레이저디스크 등 오디오세트에 덧붙어있는 하나의 「기능」으로서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완전한 사양품목이 돼버린 라디오이지만 한때는 우리가 일본에 이어 세계 두 번째 가전 대국으로 올라서는데 가장 큰 밑거름이었다.
금성사의 첫 진공관식 라디오가 선보이기 전에는 밀수로 들어온 일제라디오와 시골에는 대개 문설주에 붙여놓은 수신 스피커와 전파를 잡기 위한 어지러운 전선줄로 이루어진 잡음이 심한, 라디오라고 할 수 없는 조립식 광석수신기가 전부였다. 라디오 국산화 동기에 대해 금성사 사사는 『럭키에서 만드는 플라스틱 통 안에 진공관만 채우면 될 것 아니냐는 생각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갖은 실패 끝에 일년만에 개발한 라디오는 팔리지 않았고 그후 다시 일년이 지난 60년에는 트랜지스터 라디오까지 개발했으나 금성사는 일제와의 경쟁에 밀려 라디오 재고로 회사의 뿌리가 흔들렸다.
럭키에서 나오는 엄청난 이익을 몽땅 털어 넣으면서 사운을 걸고 버티던 금성사에 1년6개월만에 운명을 바꿔놓은 사건은 5·16.
5·16은 경제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쳐 강력한 밀수품 단속과 함께 국산품애용운동이 일어났다..
밀수품인 일본 「아지노모도」에 밀려 맥을 못 추던 「미원」이 되살아나는 것과 함께 금성사의 라디오도 먼지를 털어 내고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수입대체 산업이 활기를 찾은 것이다.
『혁명의 내용을 전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의 생각은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으로 이어져 금성사는 라디오에 힘입어 최고의 전자업체로 자리를 잡았다.
59년 라디오 한 대 값은 2만여환으로 당시 쌀 한 가마 값이 4백여환에 머물렀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비싼 가전제품이었다. 60년대 후반 흑백TV가 생산되기까지 10년 동안 왕관 모양의 금성사 상표처럼 라디오는 단연 전자제품의 왕자였고 금성사의 원로들은 이시기를 『회사 앞에는 현금을 갖고 와 물건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중간상인들로 항상 북적거렸다』고 회고한다.
이후 국내 업체들이 생산·판매한 라디오는 줄잡아 1억대가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62년 미국과 중남미를 시작으로 수출물길이 트이면서 70년대의 한국은 미 RCA사·제니스사와 일본의 히다치사 등의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 수출로 세계 최대의 라디오생산국으로 이름을 떨쳤다. 중후한 품격으로 1백v가정용 전기만 쓸 수 있었던 첫 국산품에 이어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개발과 함께 경박 단소의 물결이 높아졌다. 70년대는 소형트랜지스터 라디오에 라디오보다 더 큰 건전지를 고무줄로 묶어 들고 다니는 게 인기였으며 그동안 전송기술도 발전을 거듭해 66년에는 처음으로 FM겸용 라디오가, 70년에는 FM스테레오 라디오가 처음으로 선보였다.
지난 올림픽 때는 스타디움 안에서 8개의 채널에 맞추어 원하는 나라 말로 개막 및 폐막식 내용을 중계해 주는 일회용 라디오가 만들어졌고 요즘에는 모자나 안경에 부착해 낚시나 하이킹을 하면서 즐길 수 있는 「액세서리」용 라디오까지 나와있다.
한편 외국에서는 「BBC방송 등 멀리 떨어진 방송을 듣기에 적합한」단파겸용 라디오가 많았던데 비해 우리는 북한에서 대남 스파이용 단파방송을 내보내는 바람에 단파라디오는 금기의 대상이어서 라디오 역사에도 분단의 비극이 묻어있다. <이철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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