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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행위 즐기는 변태심리 분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불행하게도 한국의 비디오시장은 할리우드영화와 홍콩영화의 「식민지」나 다름없다. 잘 팔리는 테이프의 90% 가까이를 이런 영화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이는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더구나 이 상황이 당분간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는 더욱 골치 아프다. 그러니 비디오가게에서 싸구려 에로물이 아닌「진짜」유럽영화를 만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엘리오 페트리가 1970년에 만든 『완전범죄』(Invest·igation of A Citizen Above Suspicion·우일 영상 출시)는 보기 드문 유럽영화의 수작이다.
엘리오 페트리는 60년대와 70년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정치영화 작가로 기록되는 인물로,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중 하나다. 이 작품은 『완전범죄』라는 제목이 주는 뉘앙스와는 달리 범인이 누구인가 알아 맞추기를 관객에게 요구하는, 통속적인 추리 물이 전혀 아니다.
로마의 성공한 경찰간부인 킬러(장 마리아 볼론테 분)는 과대망상증 적인 인물로 마조히스트성향이 있는 자신의 정부 테르치(플로리다 볼칸 분)와 살인유희를 즐긴다. 이 유희의 점점 강도가세지면서 테르치는 킬러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충동질한다. 면밀한 계획을 세운 킬러는 성교도중 테르치를 죽이고 자신에게 혐의가 돌아오도록 무수히 증거를 남긴 채 현장을 유유치 떠난다. 자신의 권력을 과신한 그는 자신이 직접 경찰에 전화를 걸어 범죄를 고백할 정도로 자신만만하다.
권력 자체를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변태적인 심리를 치밀하게 그리고 있는 이 영화는「파시스트들의 정신구조를 분석한 가장 뛰어난 영화」라는 평을 받기도 했던 작품이다.
영화의 말미에서 킬러는 경찰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이 범인임을 자백한다. 그러나 권력의 무결성에 집착하는 이 집단은 오히려 킬러에게 자신이 무죄임을 깨닫게 하려 한다. 카프카적인 악몽을 방불케하는 이 대목은「벌이 없으면 범죄도 없다」는 논리가 적어도 타락한 권력집단에서는 얼마나 잘 관철되는가를 끔찍한 여운과 함께 보여준다.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과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임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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