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깨끗한 대선캠페인(국운걸린 공명선거: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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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자 「후보」줄대느라 국사 뒷전/현 총리 지침무색… “누가 유리한가”가 저울질/안기부 기밀도 몇시간 안돼 흘러 들어가
현대그룹에 대한 수사가 야당에 의해 편파시비를 불러일으키자 현승종국무총리를 비롯한 중립내각은 내심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편파」여부에 관해서야 나름의 버틸 소신이 있지만 현 총리가 보기에도 고위직 공무원들의 「줄서기」와 그로인한 기강해이 징후가 도처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각급 정부기관의 내부사정은 몇시간의 시차도 없이 속속들이 각 정당에 흘러들어간다. 이를 알려주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관계부처의 공무원이다. 그 결과 아예 무정부상태라고 해야 좋을 정도로 일부공직자의 기강은 무너지고 있다. 국가이익보다는 각기 연줄·이해를 찾아 줄서기에 나선 공무원이 많다는 얘기다. 고도의 보안과 정보관리가 필요한 안기부와 국방부의 주요회의 결과까지도 각 정당의 수뇌부에 사적 채널을 통해 전달되고 내용이 왜곡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사실 여부야 확인할 수 없지만 안기부의 보좌관실 선거개입계획도 국민당측에서는 안기부 고위당국자가 전해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공직내부의 사정이 이러함에도 지금까지 현 총리는 조직적인 관권개입이 없다고 잘라말하는데 주저해본 적이 없다.
우선 자신이 그런 의사를 전혀 갖고 있지 않을뿐만 아니라 최근의 편파공방에서도 이른바 관권부정은 시비거리가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각의 중립의지와 관계없이 공직자들의 줄서기에 관한 현실파악은 현 총리의 뒷목을 점점 뻣뻣하게 하고 있다. 현 총리는 대통령선거가 공고되던 지난달 20일 기자들과 만나 『선거전이 치열해지면 공무원들의 줄서기가 겉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매우 크리라 본다. 그러나 선거기간중이라도 목을 쳐서 본때를 보이겠다』고 호기롭게 말한 바 있다.
현 총리가 공무원들의 「줄서기」를 적발할 힘과 권위를 가졌다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중립내각 총리는 공무원사회에 허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다.
공직자 개개인이야 위 아래를 막론하고 특정정당의 후보에 다함께 우호적일 순 없다.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가 자신의 이해와 직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래서 이들의 개입 또는 영향력행사는 교묘하고 지능적일 수 밖에 없다. 현 총리의 말처럼 「목을 칠 수 있는」기회가 쉽게 발각되지 않는다. 공직자의 줄서기 양상은 꼭 이기는 편이나 특정정당만 향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지연 학연·개인적인 호·부호가 다르고 정당간 영향력 분산현상에 따라 승진과 영전의 기준도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지역은 대선승패와 관계없이 특정후보에 잘 보이는 것이 더 유리할 수 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줄서기 현상도 직급에 따라 묘한 차이를 보인다. 고급공무원일수록 안정희구적이고 하위직일수록 변화를 지향한다. 적어도 서기관(4급)이하는 변화쪽이 강한 것으로 보이며 인사정체와 무관하지 않다.
중앙부처의 경우 1,2급이상 고위직일수록 줄서기에 민감하다.
속된 표현으로 실력은 없고 어쩌다 유력인사의 배경으로 관에 몸담은 사람일수록 심하다.
이사관급이상 공무원들 가운데는 어느 후보가 집권했을 때 공무원사회의 변화가 가장 적겠는가,누가 집권하면 공직사회가 급속히 부패할 것인가에 관해 설왕설래하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누구는 어느 지역출신이고 어느 학교를 나왔으니 새 정부가 들어서면 잘 풀릴 것이라는 등의 얘기까지 있다.
그러나 인사문제만이 공무원들의 「줄서기」나 편파원인이라고 할 수 없다. 40여년간 지속돼온 「관정유착」의 부패구조가 핵심중 하나다.
『개발된지 얼마 안된 지역이라 우리 지역구에는 돈 많은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이들은 여당에 연줄을 대고 있습니다. 몇번 선거사범 단속의 위험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관청에서 알아서 해주더군요. 신고현장에 늦게 도착한다든지… 이유야 뻔한 거 아닙니까.』
서울에 있는 어느 정당의 지역구 간부가 실토하다시피 중립내각의 의지와 관계없이 말단의 조직은 기존의 관정유착이 몸에 배어있다.
현 총리와 중립내각은 이같은 현상에 사실상 속수무책이다.
정부의 사정기관은 고위공무원들의 개인적인 처지와 형편을 감안해 줄서기 개연성을 나름대로 점검했고,집중감시의 명단을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국민이 체감하는 관권은 말단에서 시작되고 중립내각은 그 말단까지 챙기기에는 역부족이다.
요컨대 공무원들의 「줄서기」는 이제 윗사람의 호령보다 보통사람의 힘으로 막아내야 할 과제로 남게 된 셈이다.<이재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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