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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영화와 공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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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근 우리 영화의 공간감은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다. 하나같이 세련된 건축물에 아름다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관객들도 '눈 호사'의 즐거움에 눈을 떴다. 공간 연출을 담당하는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누구인지 챙겨보는 눈 밝은 이들도 많다.

그런데 최근 한 공간 관련 세미나에 참석한 영화감독이 삐딱한 소리를 했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정재은 감독이 "최근 한국 영화 속의 공간들이 지나치게 럭셔리하며, 과도하게 개념적인 접근으로 추상적 공간들로 변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좋은 공간은 일상을 확장하는 공간"이라고 일침을 놓은 그는 "이런 경향이 실제 공간으로 이어질까 우려된다"고도 했다.

영화로 갈 것도 없다. TV 드라마에도 공간 연출에 대한 불문율이 있다. 주인공들의 멋진 집이다. 아주 서민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주인공들은 잘 차려 놓고 산다. 광고 협찬을 받은 최신 가전제품, 트렌디한 가구들이 소품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의 경제력이나 현실적 상황보다는 극중 공간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더 중시한다는 얘기다. 시청자들도 어느덧 평범한 직장 남녀의 호텔급 자취방에도 그러려니 한다. 완벽하게 화장한 얼굴로 잠자는 장면처럼, TV 드라마의 비현실적 관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화가 되면 더 심각해진다. 완벽한 영상미를 추구하는 까다로운 심미안의 감독들은 소품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다. 막 인테리어 잡지에서 튀어나온 듯 모던하고 세련된 공간들이 펼쳐진다. 너무 정교해서 오히려 인공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사극도 예외는 아니다. 건축과 소품들은 한 폭의 그림처럼 배치된다. 요즘 유행하는 퓨전 사극들은 하나같이 현대적이고 세련된 공간 연출로 서로 겨눈다.

물론 그 덕에 영화의 '때깔'은 좋아졌다. 시각적으로 아름답다는 데 이견은 없다. 문제는 이렇게 세련된 공간들이 과연 그 안에 살고 있는 인물들의 삶과 정서를 얼마나 반영하고 있느냐이다. 최근 우리 영화의 일부 미학적 공간들은, 주인공의 현실적인 삶의 공간이라기보다 어떤 정형화된 아름다움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처럼 보인다. 정 감독의 얘기도 그런 뜻이다. '럭셔리'한 공간 연출이 최근 우리 영화 속의 일상성ㆍ현실성 배제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주인공들은 멋진 공간에서 살지만 삶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고, 그럼에도 감독들은 삶의 때가 묻은 공간보다 잘 꾸며진 공간을 선호하는 아이러니다. 이렇게 '겉치레'에 치중하는 동안 충무로는 우리 삶의 현실을 놓쳐 버린 것은 아닐까.

양성희 문화스포츠 부문 차장